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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체결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한일협정 비준 이후 대면한 양측 대표단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영어표기
The Conclusion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한자표기
한일협정
발생일
1964년 6월 3일
종료일
1965년 6월 2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한국의 박정희(朴正熙) 정권과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제6차 한일회담은 1964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대운동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한일 양국은 회담 타결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1964년 12월 제7차 한일회담이 개시됐고, 약 반년 뒤인 1965년 6월 22일, 마침내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됐다.

배경

<구원을 씻고 내일을 위하여>(한일협정체결과정 홍보 영상)(국가기록원)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일 양국 앞에는 식민지 지배/피지배 관계의 유산에서 비롯한 여러 현안을 해결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해야 할 과제가 놓였다. 한국은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 회담을 통해 이들을 다루어야 했다. 그러나 1951년 10월에 시작된 한일회담은 1950년대 3번에 걸쳐 중단과 재개를 거듭했을 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양국 모두 수교를 시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데다 소위 ‘구보타(久保田貫一郞) 망언’과 재일조선인 북송(北送), 일본어선·어부 나포 등 충돌 요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주)001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 모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였다. 로스토(Walt W. Rostow)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근대화론자들이 주도한 미국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의 대외 정책은 저개발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했고, 특히 아시아 개발에서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했다. 더욱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확대하던 상황에서 자연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이 부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주)002 한편 일본 이케다 정부와 한국 박정희 정권도 반공과 경제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접점이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양국은 중단됐던 한일회담을 재개한다는 데 합의했다.

원인

1961년 10월 20일 도쿄에서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됐다. 최대 현안이었던 청구권 문제의 경우 소위 경제협력 방식을 통해 정치적으로 절충한다는 구상이 양쪽에서 등장했다. 이미 제5차 한일회담 기간이었던 5.16쿠데타 직전에 양국 간 이런 구상이 오간 바 있었다.

제6차 한일회담에 참가할 대표단과 악수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1년 10월 17일)(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의 대일 청구권 8항목에 대한 항목별 토의가 성과 없이 끝난 1962년 3월 이후 양국은 정치적 타협점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가 1962년 10~11월의 김종필(金鍾泌)-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정치회담이었다. 배의환(裵義煥)과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두 수석대표의 예비 절충을 거친 두 차례 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은 무상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 이상이라는 금액에 합의했다. 다만 이것은 자금의 명목 등 많은 부분을 공백으로 둔 극히 불완전한 합의였다.

김-오히라 합의 후 양국은 청구권으로 공여될 생산물 종류와 공여 방식, 차관의 경우 상환 기간과 방식 등 세부 사항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1964년 3~4월 원용석(元容奭)-아카기 무네노리(赤城宗德) 양국 농림부 장관 회담에서는 평화선과 어업 문제가 논의됐다. 여기서도 경제협력 방식이 해결의 실마리로 제기됐다. 즉 평화선 철폐를 전제로 전관수역과 공동규제수역을 설치하고, 대신 어업 협력 명분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1963년의 회담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한국의 경우 민정 이양이란 중요한 이벤트가 1963년 정국을 좌우하면서 회담에 진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정 이양 후 한일 양국은 한일회담 타결을 서둘렀다. 1964년 3월 휴회 중이던 회담이 재개됐고, 동시에 양국은 농림부 장관 회담을 열어 첨예하게 대립했던 어업 문제의 이견을 좁히는 데 주력했다. 수석대표 간에는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일정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에 앞서 연초에는 미국 러스크(David D. Rusk) 국무부 장관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른 회담 일정은 한국에서 일어난 거센 반대운동으로 다시금 표류했다. 특히 야당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졸속·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한일회담을 넘어 정권 자체를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했다. 한일회담은 재차 중단됐다.주)003

전개

국제 정세와 미국의 대응

6.3항쟁으로 한일회담이 중단됐지만 회담을 타결시키려는 한·미·일 3국 정부의 의지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이 군대를 동원해 6.3항쟁을 진압한 것 자체가 미국이 한일회담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특히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1951년 회담 개시 이래 원칙적으로 제3자 입장에서 불개입을 고수했던 지금까지 정책 기조와 달리 회담 조기 타결을 바라는 입장을 한층 명확히 표명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 시기 동아시아 냉전적 대립 양상이 한층 가열됐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내전의 확대 추세를 지켜보던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 조작과 북폭을 기화로 베트남 문제에 직접 개입을 결정했다. 다른 한편 1964년에 중국은 프랑스와 수교한 데 이어 핵실험에 성공해 국제사회에서 다섯 번째 핵보유국으로 등장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의 위기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으로서는 한일회담 타결을 서둘러야 했다.주)004

1964년 10월 3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번디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의 회담(경향신문사)

이 같은 미국의 입장은 크게 두 갈래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밀실 외교가 굴욕적 타결의 상징이 되어 반대운동 측의 집중적 비판을 받았던 김종필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외적으로 한일회담과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6.3항쟁 약 두 달 후인 8월 17일 브라운(Winthrop G. Brown) 신임 주한미국대사와 이동원(李東元) 외무부 장관은 미국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타결 후에도 대한(對韓) 군사·경제원조를 계속 강화할 것이라는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이어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번디(William P. Bundy)가 일본과 한국을 방문해 같은 내용을 재확인했다. 나아가 미국은 한국이 제기한 일본의 특사 방한 건을 두고 한일 사이에서 누가 언제 방한할 것인지를 협의하는 등 조정자 역할에 적극적이었다.

한일 차관 및 긴급 원조 교섭

한일 두 정부 역시 6.3항쟁으로 분출된 한국의 여론을 주시하면서도 교섭 창구를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양국은 회담 중단 기간에도 일본의 차관(자본재) 및 긴급 원조를 의제로 교섭을 이어갔다. 대일(對日) 자본재 연불(延拂) 수입주)005 건은 양국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1963년경부터 논의됐고, 긴급 원조는 한국의 당면한 경제 위기에 대처한다는 취지에서 6.3항쟁 이후 일본이 제안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켜 한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호전시킴으로써 회담 재개와 타결의 디딤돌로 삼는다는 의도가 담긴 사안이었다. 차관과 원조 교섭은 같은 해 12월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되는 바탕이자 한일협정 체결에 앞서 양국의 실질적인 경제 관계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했다.주)006

제7차 한일회담 개시

1964년 12월 3일 한일회담 마지막 제7차 회담이 시작됐다. 제6차 회담 때와 비교해 양국 모두 관계자에 변화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4년 7월 정일권(丁一權) 총리가 겸직하던 외무부 장관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동원이 임명됐고, 10월에는 주일대사 겸 회담 수석대표 배의환이 김동조(金東祚)로 교체됐다. 이 같은 외교라인 인선에는 회담을 조속히 타결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 일본에서는 병으로 사임한 이케다에 이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이 발족했고, 회담 개시 직후 수석대표 스기가 병사함에 따라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로 교체됐다. 사토 총리는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중일 관계와 더불어 한일관계를 양대 외교 현안으로 거론하며 한일회담 타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바라는 미국 및 국내 정치적으로 자민당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대응이었다.

다카스기 발언 진화

의욕적으로 시작된 제7차 회담은 시작과 동시에 위기에 봉착했다. 다카스기 일본 수석대표가 1965년 1월 7일 외무성 기자 클럽에서 회견 중 “일본의 조선 통치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조선을 20년쯤 더 통치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가옥 등을 모두 두고 왔으며, 창씨개명만 해도 조선인을 동화하여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려고 한 것이었으므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과거를 들추는 것은 좋지 않다” 등의 발언을 한 것이다. 외무성이 즉각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O.T.R.)를 요청했지만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1.10.)했고, 한국 동아일보에도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1.19.)되면서 파문이 확대됐다.
다만 1953년 구보타 망언 때와 달리 한일 양국은 사태 수습을 위해 발언을 문제 삼지 않고 덮는 길을 택했다. 다카스기 일본 대표가 한국 특파원들을 상대로 발언을 부인하는 회견을 열었고, 1월 20일 수석대표 회담에서 김동조 한국 수석대표가 문제를 거론하고 다카스기 대표가 다시금 부인했다. 양국의 사전 합의에 따른 계획된 행동으로 서로 회담 타결이라는 목표를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한바탕의 촌극이었다.주)007

시나 외상의 방한과 가조인

1965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간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외상이 방한,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이 이뤄졌다. 시나의 방한은 일본이 거물급 인물을 사죄 사절로 한국에 보낸다면 회담 진전에 도움이 될 것이란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구상에서 비롯했다. 이동원 장관은 1964년 10월에 방한한 번디 국무부 차관보와 이 문제를 협의해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주일미국대사로 하여금 노력하도록 하겠다는 긍정적 반응을 얻었고, 11월경 시나 일 외상이 방한을 수락했다. 시나 일 외상은 김포공항에 도착한 직후 성명을 통해 “양국 간의 긴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 9월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郎) 외상이 방한했을 때, “과거 관계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한 걸음 나아간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반성’의 주체를 명확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한계도 분명했다.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관계조약에 가조인하는 양국 대표(경향신문사)

한일회담 초기의 제1~2차 회담 이후 제6차 회담까지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던 기본조약 문제는 1965년 1~2월 13회에 걸친 집중적인 토의를 거쳐 시나 일 외상 방한 시 타결됐다. 조약의 명칭과 형식, 내용까지 여러 이견을 조정한 결과였다. 명칭·형식의 경우 애초 한국이 ‘평화’ ‘조약’을 원했다면 일본은 ‘우호’ ‘공동성명’으로 격을 낮추길 원했다. 한국은 ‘기본’이란 명칭을 ‘우호’보다 기초적이고 넓은 의미로 간주했다. 문서에 과거사, 즉 식민지 관계 청산의 맥락을 담아낼 것인가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전문(前文)에 양국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는 모호한 표현이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체 7조의 조문에서는 소위 구 조약 무효 확인 조항(2조)과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 조항(3조)이 쟁점이었다. 전자는 한일 간 1910년 이전에 체결된 조약은 모두 원천 무효라는 것으로 한국이 한일협정에 과거사 청산의 성격을 담기 위해 중시한 부분이었다. 후자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하여 북일 관계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다. 일본은 이들을 조문에 넣는 것을 모두 반대했고, 역으로 한국의 관할권은 휴전선 이남에 그친다는 내용을 넣고자 했다. 이를 둘러싸고 양국은 시나 일 외상 방한 기간 중 두 번의 외상 회담을 거쳐 출국일인 20일 새벽에야 절충점을 찾아냈다. 전자는 1910년 이전의 조약은 모두 ‘이미(already)’ 무효라는 것, 후자는 한국 정부가 ‘유엔 결의 제195(Ⅲ)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as specified in the Resolution 195(Ⅲ) of the UN General Assembly)’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전자는 일정 시점까지는 조약의 효력이 있었다는 것, 후자는 한국이 1948년 유엔이 총선거를 감시할 수 있었던 지역, 즉 남한 지역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의미를 함축했다. 표면적으로는 양국 절충의 결과였지만 내용상으로는 일본의 입장에 가깝게 타결됐다고 볼 수 있다.주)008

기본조약 가조인 이후 회담의 중심은 개별 의제로 넘어갔다. 특히 차균희(車均禧)와 아카기 양국 농림부 장관은 3월 3일부터 약 한 달간 도쿄에서 10회에 걸친 집중적인 회담을 열고 어업 문제를 논의했다(제2차 농림부 장관 회담). 청구권과 재일 동포 법적 지위 문제도 양국 대표단 간 밀도 높게 논의됐다. 3월 24일부터는 미국 출장을 마친 이동원 장관이 합류해 27일까지 나흘간 매일 외무부 장관 회담을 열고 막판 조율에 힘썼다. 그 결과 4월 3일 어업, 청구권, 재일 동포 법적 지위 협정도 가조인됐다.

어업의 경우 큰 틀에서 볼 때, 일본보다 어업 역량이 뒤졌던 한국이 어업 자원 보존 및 어업 규제에 중점을 두었다면 일본은 공해(公海) 자유의 원칙을 바탕으로 넓은 어장과 자유롭고 안전한 조업을 보장하는 데 주력했다. 구체적으로는 제주도의 기선 획정, 공동규제수역에서 어획 규제 방법, 어업 협력 자금, 크게 세 문제가 쟁점이었다. 첫 번째의 경우 본토와 제주도를 잇는 전관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한국과 제주도가 본토와 너무 떨어져 내해(內海)로 볼 수 없다는 일본의 입장이 대립했다. 일본이 본토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전관수역을 인정한 후에는 그 폭을 두고 대립했다. 두 번째 쟁점에서 어획량 규제의 경우 한국이 요구한 어획 톤수와 일본이 주장한 출어 척수 기준을 모두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감시 방법으로는 각기 자국 배를 단속하는 기국주의(또는 선적국주의)가 채택됐다. 이것은 일본의 요구였다. 세 번째로 한국이 최소 1억 달러 이상을 요구한 어업 협력 차관은 9천만 달러로 낙착됐다.주)009

청구권 교섭의 쟁점도 크게 셋이었다. 첫 번째는 선박과 문화재 ‘반환’ 문제가 여기에 포함되는지 여부였다. 일본은 포함-소멸된다는 입장이었고, 한국은 별개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끝에 선박 청구권은 선박 차관 3천만 달러로 대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화재는 별도로 해결하되 ‘문화재 문제 해결 및 문화협력’을 위해 일부 문화재를 ‘인도’한다는 것으로 합의했다.주)010 청구권, 나아가 한일회담을 경제협력 방식으로 타결한다는 큰 기조가 문화재 문제에도 관철됐다. 두 번째 쟁점인 김-오히라 합의의 ‘상업 차관 1억 달러 이상’은 어업과 선박 차관 총 1억 2천만 달러를 포함해 ‘3억 달러 이상’으로 증액됐다. 세 번째는 청구권 자금을 집행하기 위한 세부 사항을 확정하는 문제였다. 생산물의 종류, 자금 사용 계획의 작성과 확인 절차, 구매 계약 주체와 절차, 계약 체결지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세부 사항을 두고도 양국이 마지막까지 대립했던 이유는 이것들이 자금 사용의 주도권 또는 자율성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금의 성격, 즉 청구권 자금인가 아니면 경제협력 자금인가를 다투는 문제이기도 했다.

어업·청구권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합의에 도달한 재일 동포 법적 지위 교섭에서는 영주권 부여 범위를 두고 마지막 논전이 벌어졌다. 즉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일 이전부터 일본 거주자 및 그 직계비속으로서 그 이후부터 한일협정 발효 5년 후까지 일본에서 출생-거주한 자를 ‘협정 영주권자’로 규정했는데, ‘협정 영주권자’ 자손의 경우 1대에 한해 영주권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 일본의 입장과 계속해서 영주권을 줘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이 대립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양국은 ‘협정 영주권자’ 자손이 성인이 되는 시점, 즉 협정 발효 25년 후까지 다시 협의하는 것으로 합의했다(1991년 한일 각서로 자손에게 지속적인 영주권 부여 확정).주)011

한일회담 타결과 국교 수립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4월 3일까지 기본조약과 개별 의제 가조인에 성공한 양국 대표단은 이후 약 두 달간 미비점을 보완하고 합의 사항을 조문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1965.5.16.~27.) 전에 타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마침내 양국은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어업, 문화재, 재일 동포 법적 지위 등 4개 협정을 체결했다. 1951년 10월 예비회담이 시작된 이래 13년 8개월여 만이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다시금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났지만, 한국과 일본의 국회는 공화당과 자민당, 여당 중심으로 8월 14일과 12월 11일 각각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2월 18일 서울에서 비준서가 교환됐다. 이로써 한일 국교가 정식으로 수립됐다.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을 마치고 축배를 드는 한일 양국 대표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결과/영향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한일 양국은 1945년 해방/패전으로부터 20년 만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크게 보면 한일 국교 ‘정상화’는 1950년대 이래 미국의 주요 목표였던 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의 중요한 한 축이 맞춰진 것을 의미했다. 냉전기 미국의 자장 안에서 반공과 경제성장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닌 한일 두 정부는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일본 대사관 앞 200번째 수요집회(1996년 1월 24일)(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좁히지 못한 채 식민지 과거사 청산에 실패한 한일협정은 결코 양국 관계를 ‘정상화’할 수 없었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1910년 한일병합이 무효이며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가 잘못된 과거였음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협정문 어디에도 식민지기에 대한 사과나 불법 점령에 관한 내용은 없으며, 해석에도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불완전한 한일협정으로 박정희 정권은 과거 일본의 식민 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1992년 1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 집회/수요 시위가 ①전쟁범죄 인정 ②진상 규명 ③공식 사죄 ④법적 배상 ⑤전범자 및 책임자 처벌 및 징계 ⑥역사 교과서에 기록 ⑦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7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요컨대 한일협정 체결은 이미 당대부터 여기저기 균열을 드러낸 양국의 새로운 갈등의 시작에 가까웠다.

주)001
1950년대 한일회담 경과에 대해서는 박진희, 2008, ≪한일회담: 제1공화국의 대일정책과 한일회담 전개과정≫, 선인 참고. 
주)002
1960년대 미 케네디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이종원,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 민족문제연구소 편,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 30주년을 맞이하여≫, 아세아문화사, 1995;박태균, ≪원형과 변용≫,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등을 참고. 
주)003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참고. 
주)004
6.3항쟁으로 한일회담이 중단된 이후 미국의 한일관계 관여에 대해서는 박태균, <한일협정 반대운동시기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정책>,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편, ≪외교문서 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1: 한일회담과 국제사회≫, 선인, 2010;李鍾元、<日韓会談の政治決着と米国>、李鍾元·木宮正史·浅野豊美 共編、≪歴史としての日韓国交正常化≫、法政大学出版局、2011 등을 참고. 
주)005
일종의 외상 또는 신용거래로 수출입대금의 결제를 상품 인도/인수 후 일정 기간 유예하는 대금결제방법. 특히 개발도상국과 대규모 설비재 수출입 거래 시 적용. 당시 한국의 근거법은 <장기결제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1962.7.31, 법률 제1114호). 
주)006
신재준, <국교정상화 전, 한일경제협력 논의의 전개와 성격>, ≪역사학보≫ 237, 역사학회, 2018 참고. 
주)007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참고. 
주)008
기본조약 교섭에 대해서는 요시자와 후미토시,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의 기본관계 교섭> 및 이원덕, <한일기본조약과 북한문제>(이상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편, ≪외교문서 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2: 의제로 본 한일회담≫, 선인, 2010) 등을 참고. 
주)009
어업회담에 대해서는 지철근, ≪평화선≫, 범우사, 1979;방현명, <한일 어업회담(1951년 ~ 1965년)에 관한 실증적 연구>, 국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현대송, <한일회담의 정치학: 선박 반환 교섭과 어업·평화선·독도 문제>, 이원덕 외, ≪한일국교정상화 연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6 등을 참고. 
주)010
문화재 반환 교섭에 대해서는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동북아역사논총≫ 51; 엄태봉,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 협상의 재조명>, ≪아태연구≫ 26(2), 2019 등을 참고. 
주)011
법적지위협정에 대해서는 한경구, <한일법적지위협정과 재일한인 문제>,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편, ≪외교문서 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2: 의제로 본 한일회담≫, 선인, 2010;이성, <한일회담에서의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 교섭(1951-1965년)>, 성균관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등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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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부터 한일국교정상화(경향신문사)
  • 1964년 10월 3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번디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의 회담(경향신문사)
  • 14년 끌어온 한일회담 오늘로 사실상 매듭(경향신문사)
  •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관계조약에 가조인하는 양국 대표(경향신문사)
  • 제6차 한일회담에 참가할 대표단과 악수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1년 10월 17일)(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을 마치고 축배를 드는 한일 양국 대표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일본 대사관 앞 200번째 수요집회(1996년 1월 24일)(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 양국대표가 협정서를 보고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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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을 씻고 내일을 위하여>(한일협정체결과정 홍보 영상)(국가기록원)
참고문헌
  • 高崎宗司 저, 김영진 역, ≪검증 한일회담≫, 청수서원, 1998.
  •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 대한민국 정부, ≪한일회담백서≫, 196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8.
  • 박태균, <한일협정 반대운동시기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정책>,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편, ≪외교문서 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1: 한일회담과 국제사회≫, 선인, 2010.
  • 오타 오사무 저, 송병권·박상현·오미정 역, ≪한일교섭 : 청구권문제 연구≫, 선인, 2008.
  • 요시자와 후미토시 저, 이현주 역, ≪현대 한일문제의 기원 : 한일회담과 ‘전후 한일관계’≫, 일조각, 2019.
  •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2.
  •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 장박진, ≪미완의 청산 :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의 세부 과정≫, 역사공간, 2014.
  • 신재준, <1960년대 한국의 대일청구권 및 ‘경제협력’ 교섭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 李鍾元、<韓日国交正常化の成立とアメリカ - 1960 ~ 1965年>、近代日本研究会 編、≪戦後外交の形成≫、東京: 山川出版社、1994.
  • 李鍾元、<日韓会談の政治決着と米国>、李鍾元·木宮正史·浅野豊美 共編、≪歴史としての日韓国交正常化 1: 東アジア冷戦論≫、東京: 法政大学出版局、2011.
집필정보
집필자
신재준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11-19 01: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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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대표가 협정서를 보고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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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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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체결
  • 설명 한일협정 비준 이후 대면한 양측 대표단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