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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대학생들의 한일협정조인반대시위
유형
사건
분류
학생 운동
영어표기
The Movement against the signing and ratification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한자표기
韓日協定調印批准反對運動
발생일
1965년 2월 16일
종료일
1965년 9월 2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5년 한일 양국은 기본관계조약을 비롯한 여러 의제를 타결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학생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은 한일협정의 불평등성, 반민족성을 규탄하고, 협정 체결을 강요하는 미국을 비판하며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을 통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반민족성, 반민주성이 폭로되었으며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민주 세력이 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배경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도 자본 투자와 상품 판매 시장이 필요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학생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은 한일회담에 임하는 박정희 정권의 저자세와 밀실 협상을 굴욕적 외교로 규정하고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64년 6월 한일회담이 중단됐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하는 김종필. 새로 출범한 사토 내각도 한일회담에 적극적이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회담이 1964년 말에 재개될 분위기가 조성된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과 미군의 ‘북폭’으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었다.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미국은 전쟁 부담이 커지고,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일 지역 안보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이 더욱 커짐에 따라 한일 양국 관계 정상화가 절실해 졌다. 미국 고위 관리가 한일 두 나라를 차례로 방문하여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자본을 마련하고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긴장감 고조에 위기감을 느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 입장을 밝혔다. 새로 출범한 일본의 사토(佐藤榮作) 내각도 미국의 압력에 호응하고 국외 자본 투자와 상품 판매 시장 확보 필요성에 따라 한일회담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원인

1964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한일회담이 재개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 입장을 밝히면서 회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이 두 나라의 기본 관계를 밝히는 기본조약을 협의해 ‘한국 정부의 유일 합법성 확인 조항’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로 합의했다. ‘1910년 이전의 조약·협정 무효 확인 조항’에 대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내용으로 합의했다. 기본조약의 두 쟁점은 문구가 모호하고, 서로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2월 20일 한일 양국은 한일협정 기본관계조약에 가조인했다. 시민, 학생, 야당은 한국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아 만족할 내용이 아니라며 비판했다.

1965년 3월 한일 두 나라는 ‘재산청구권·경제협력협정’, ‘어업협정’,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등을 타결하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4월 3일 ‘재산청구권·경제협력협정’에서 청구권 문제에 대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4조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합의했다.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서는 무상 제공 총액 3억 달러, 장기 처리 차관 총액 2억 달러, 민간 신용 제공 총액 3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했다. ‘어업협정’은 한국 어민이 배타적으로 조업할 수 있는 어업수역을 공해 부분을 포함하여 12해리까지 설정하고, 40해리까지는 한일 두 나라 어민이 같이 조업할 수 있는 공동규제수역으로 합의했다. 경제협력 범위가 김종필(金鍾泌)·오히라(大平正芳) 메모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화선 문제는 회담에서 전혀 논의하지 않아 영토의 포기이자 주권의 포기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한일협정 조인과 그 내용을 알리는 정부의 홍보 영상(국가기록원)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은 1945년 8월 16일 이전부터 계속하여 일본에 거주한 사람과 그 직계비속으로 일본에 계속 거주한 사람 가운데 한국 국적을 선택한 사람이 영주 신청을 할 경우 허가하기로 합의했다. 이 또한 그 자손들의 영주권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처리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해서는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를 반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반환이 아닌 ‘인도’라는 표현으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협정의 쟁점 사항을 일괄 타결하고 4월 3일 가조인했다.

전개

1.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1) 한일협정가조인저지·규탄투쟁

1964년 12월 재개된 한일회담이 급속히 진전되어 1965년 2월 서울에서 열릴 회담에서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한일회담 규탄 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 시나(椎名悅三郞) 외상이 한일협정 기본관계조약 가조인 차 방한한 것을 계기로, 2월 1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6.3항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학생, 야당도 일장기를 불태우는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한일회담을 규탄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2월 20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가조인하고, 여러 현안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일본에서 한일 외상회담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한일 기본관계조약이 가조인된 후 잠잠하던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은 3월 일본에서 한일회담이 열리면서 재개됐다. 3월 범국민투위는 강연회를 열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과 정권 유지를 위해 굴욕외교에 나서고, 한일협정이 일본의 경제 침략을 허용할 것이라고 규탄하며 범국민적인 투쟁을 호소했다. 이어 목포, 부산, 춘천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성토대회를 이어갔다.

한일협정가조인규탄시위에 나선 동국대생(≪사상계≫ 1965년 6월호)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한일 외상회담이 열리는 3월 26일부터 한일협정이 가조인된 4월 3일까지 투쟁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동국대 학생들이 한일회담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광주에서도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감행했다. 대구의 대학생과 원주의 고등학생들도 박정희 정권의 무능력과 실정, 매국적인 한일협정을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거리시위를 벌였다. 특히 대구에서는 시청 광장에서 한 시민이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를 규탄하며 분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시위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개학 직후라는 학내 분위기와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한 학생들이 처벌받거나 졸업하여 학생들이 투쟁 역량을 다시 결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이 주춤한 사이 4월 3일 한일 두 나라는 그동안 쟁점이던 어업 문제, 청구권 문제,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등을 일괄 타결하고 한일협정을 가조인했다. 박정희 정권은 예상되는 학생시위에 대해 강경한 대응 방침을 밝히고, 각 대학에 장학관을 파견하여 학생들의 동향 파악에 나섰다. 또한 시위가 일어난 대학의 총·학장을 비롯한 책임자의 엄중한 문책의 방침을 밝혔다.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자 야권과 학생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3월 개학 후 투쟁 역량의 결집에 집중하던 학생들은 각 학교별 분산적인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대학 연합의 투쟁 조직의 결성을 추진했다. 서울 소재 대학 학생 대표들이 ‘평화선사수학생연합투쟁위원회’(학연투위)를 결성했으며,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경북학생총연합회’ 결성을 결의했다.주)001

학연투위 투쟁 선언에 맞추어 4월 9일 동국대 학생들의 규탄 대회를 시작으로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 투쟁이 본격화됐다. 이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도 성토대회를 열거나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서울의 10개 대학 학생 50여 명이 연합 시위를 계획하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4월 13일에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였다. 4500여 명의 학생들이 각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로 진출하여 평화선 사수, 굴욕적 한일협정 무효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5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10여 명이 구속됐다. 시위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으며,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국회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와 가조인 철회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제주에서도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였다.

한일협정가조인규탄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박정희 정권의 탄압도 강화됐다. 4월 13일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중상을 입은 동국대의 김중배(金仲培) 학생이 15일 저녁 8시 경 사망하여 시위 양상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동국대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은 김중배 학생의 추도식을 열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렬해지고 고등학생으로까지 확산되자, 4월 16일 박정희 정권은 4월혁명 5주년을 앞두고 학생시위가 크게 일어날 것에 대비해 대학과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지시했다. 또한 학생과 시민을 위압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은 물론 공군 정찰기,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4월 19일 4월혁명 기념일에 서울에서는 대부분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 일부 대학에서 침묵시위가 있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제주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진 뒤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대구에서도 고등학생들이 4월혁명 기념식을 마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어 대구, 대전, 전주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진 후 평화선 사수,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보장, 구속 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하자, 시위가 일어난 학교들이 휴교에 들어갔다.

4월 22일 전국 대부분 학교의 휴교령으로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대구에서는 전날에 이어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마친 후 거리시위를 시도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거리로 진출하여 한일협정 반대, 학원 자유 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연이은 시위로 400여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다.주)002

한일협정가조인저지·규탄투쟁에서는 회담에 저자세로 임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협정의 주요 내용을 규탄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또한 한일회담에 개입하는 미국을 비판하고 박정희 정권의 폭력 진압과 학원 자율성의 침해를 규탄했다.

2) 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투쟁

한일 양국은 한일협정을 가조인한 뒤 정식 조인에 박차를 가했다. 야당 의원들은 4월 말 한일협정이 비준될 경우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으며, 범국민투위는 다시 전국을 순회하며 궐기대회를 열었다. 5월 부산과 광주에서 열린 궐기대회에는 수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으며, 궐기대회 후 일부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광주와 목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굴욕외교 반대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5월 18일 미국에서 박정희-존슨(Lyndon B. Johnson)의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서울대 학생들은 한일협정과 미국의 개입을 비판하는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였다. 학교 당국이 휴강 조치를 취하자, 학생들은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사찰 금지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5월 들어 대부분 휴교가 해제됐지만, 일부 학교를 제외하고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협정 내용에 대한 한일 정부의 입장 차이로 정식 조인이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시위 학생들의 징계, 학생회 간부를 비롯한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경찰과 학교 측의 집중적인 감시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화여대 6.23시위(≪사상계≫ 1965년 6월호)

6월 하순에 한일협정을 정식 조인할 것이라는 정부 방침이 알려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활동이 다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거리 시위와 단식농성을 벌였다.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호혜 평등의 한미행정협정 체결 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단식농성은 각 학교로 확산되어 6월 21일까지 전국 13개 대학 800여 명에 이르렀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을 하루 앞둔 서울 12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일제히 거리시위를 감행했고, 이날 시위로 9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전국 주요 대학은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예년보다 빨리 방학에 들어갔으며, 서울 50여 고등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6월 22일에는 전국에 갑호 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서울 14개 대학 학생과 고등학생 1만여 명이 제2의 을사조약 즉시 철회, 평화선 사수, 일본의 경제 침략 야망 포기, 한미 불평등 관계의 개선을 촉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 주변에는 시위 진압을 위해 무장 군인이 동원됐다. 인천과 제주에서는 대학생들이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인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대구와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이 매국외교 즉시 중지, 제국주의 세력 축출, 살인 원흉 엄중 처단을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도쿄에서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됐다.주)003

한일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인 6월 23일 서울에서는 대학별로 수백 또는 수천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지고 거리시위를 벌인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성토대회 후 투석전을 벌이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10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한일협정을 조인한 이동원(李東元) 외무부 장관이 귀국하는 6월 24일에는 서울, 대구, 부산, 대전에서 대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 철회, 구속 학생 석방, 폭력 경찰 엄단 등을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가지거나 시위를 벌였다.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와 단식농성이 이어졌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특히 서울, 대구, 전주, 충주, 논산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또한 고려대 학생들은 한일협정 무효 선언 및 협정식 화형식을 가진 후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확산하는 고등학생 시위를 막기 위해 휴교 조치와 가정실습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대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교사들도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은 일본 상품 축출, 외래품 사용 금지의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일본 상품 불매와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는 서명운동도 벌였다. 제주에서도 고등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가거나 시위를 시도했다.주)004

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투쟁에서는 평화선 사수, 일제의 경제 침략 저지, 한미 불균등 관계 개선 등을 촉구했으며, 강경한 대응과 학원 자유를 침해하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했다. 학생들은 시위, 단식농성, 화형식, 서명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벌였다.

2. 한일협정 비준반대와 무효화투쟁

1) 한일협정비준저지투쟁

한일협정이 조인된 후 서울의 모든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 각 대학별 투쟁이 어렵게 되자, 학생들은 연대 투쟁을 모색했다. 6월 30일 고려대, 동국대를 비롯한 서울 6개 대학 학생들이 한일협정 토론회를 가진 후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한 연합 조직의 결성을 결의하고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공동 성명서를 채택, 발표했다. 7월 13일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를 결성했으며, 이후 참여 대학이 늘어 11개 대학 연합 조직으로 발전했다. 한비연은 공식적인 각 대학 총학생회와 비공식 조직인 투쟁위원회가 망라된 조직이었다. 한비연은 장기적, 대중적 활동을 지향했지만, 방학으로 활동이 어려워 대규모 시위나 단식농성을 유보하고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대학과 고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서 학생시위가 소강상태를 보일 무렵 야당 의원과 사회 각 분야 지도층들이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을 벌였다. 민중당은 한일협정이 조인된 6월 22일 범국민투위와 함께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이고, 윤보선(尹潽善) 민중당 고문을 비롯한 민중당 의원과 범국민투위 간부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교수들도 학생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발표했다. 그동안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개신교 목사들도 한일회담을 비판하고 국회의 비준 거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군산, 대구, 대전, 서울, 춘천 등지에서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정부와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역사학회 등 역사학 관련 단체도 호혜 평등의 원칙에서 벗어난 한일협정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인들도 국민의 단결과 궐기를 호소하고 민족 자주와 주권 옹호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밝혔다.주)005

조국수호협의회가 주최한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월 12일 한일협정 비준을 위한 임시국회가 열리자, 서울 18개 대학의 교수 300여 명이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하고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의 거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구의 대학교수들은 서울의 교수단이 발표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서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비역 장성들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경주의 각 종교계 대표들은 한일협정 비준 보류와 민심 안정을 촉구하는 권유문을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냈다. 사회 각 분야 지도층은 한일협정 비준 저지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조국수호국민협의회’(조국수호협)를 결성했다. 조국수호협은 한일협정 비준 전에 국회의원 선거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범국민투위와 공동 투쟁을 모색했다.주)006

7월 14일 박정희 정권은 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을 통해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했다. 방학 동안 정국 추이를 관망하던 한비연 대표들은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선배들과 모임을 가지고 공동 투쟁을 결의한 데 이어 야당 의원을 만나 의원직 사퇴와 투쟁 동참을 촉구했다. 그러나 한일협정 비준 문제를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된 야당 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 29일 국회가 비준 동의안을 심의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 한비연은 독자적인 투쟁의 입장을 발표하고 대학 연합 투쟁을 선언했다. 8월 11일 국회 특별위원회에서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야당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한비연은 서울대에서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를 열어 한일협정을 폐기하고 국회 해산 후 총선을 실시하여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비준 동의안을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야권과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14일 공화당은 야당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주)007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에서는 학생들이 방학으로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대신 법조계, 학계, 종교계 등 사회 각 분야 지도층 인사들이 한일협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2)한일협정비준무효화투쟁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통과되자, 학생들은 방학 중이었지만 비준무효화투쟁에 나섰다. 8월 21일 서울대 학생들은 한일협정비준무효화선언식을 가지고 규탄 대회를 열었다. 이어 서울과 부산의 대학생들이 각 대학별 수천여 명의 규모로 한일협정 반대와 국회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가졌다. 학생들은 ‘매국 국회, 매국 문서, 매국 정부’의 화형식과 국회의사당 모형에 불을 지르는 ‘일당 국회 화형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고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했으며,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킨 국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8월 말 모든 학교가 개강하면서 시위 분위기가 고조됐다. 서울의 일부 대학에서는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구호가 나왔으며, 비준안을 통과시킨 매국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주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삭발과 단식투쟁을 벌였으며, 대전에서도 대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의 국회 의결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광주의 대학생들도 비준 무효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공화당에 전달했다. 8월 24일에는 대학생 1만여 명이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시위를 벌였다.주)008

박정희 정권은 학생시위가 확산하자, 학생시위를 엄단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특히 미국과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학생들의 구호가 북한 주장을 대변하는 반국가적이고 반미적 내용이라는 이유로 내란죄와 반공법을 적용하여 시위 학생들을 구속시키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 조치 일환으로 서울대 법대 투쟁을 이끌었던 학생회장을 학교 당국이 퇴학시켰다. 여기에 맞서 학생들은 학장 퇴진과 학생회장 복적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또한 대다수 대학의 학생들은 개학 후 치를 예정이던 1학기 기말고사를 거부했다.

박정희 정권과 학교 당국의 강경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대학생들은 거리시위를 벌였다. 특히 8월 25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무장 군인들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했다. 고려대 교수들은 이를 규탄하고 정부의 공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며, 학생들은 철야 농성을 벌였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 각료 전원과 서울 각 대학 총·학장, 군 수뇌부를 배석시킨 채 학교를 폐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시위를 뿌리 뽑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어 다음날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각 학교에 무장 군인을 배치했다.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장(≪사상계≫ 1965년 10월호)

박정희 정권의 강경한 방침과 위수령에도 불구하고 서울 6개 대학 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였다. 8월 26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다시 무장 군인이 난입하여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연행했으며, 연세대에서도 무장 군인이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대전에서는 각 대학 학생 대표들이 고등학생과 연합 시위를 추진했다. 8월 27일 고려대에서 서울 각 대학 학생 대표를 포함한 1500여 명의 학생들이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를 열어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고, 매국적 한일협정의 즉각 폐기와 무효화, 매국적 국회 즉시 해산, 학원 난입 공개 사과, 구속 학생 석방 등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농성에 들어갔다.주)009

학생들과 각 분야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의 방침은 더 강경해졌다. 8월 27일 학생시위의 책임을 물어 문교부 장관과 서울대 총장을 경질했으며, 서울 각 대학의 시위를 주도한 학생 10여 명을 제적하고 20여 명의 학생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어 폐교를 불사하는 조치와 함께 시위 주동자와 배후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와 검거에 나서고, 문교부는 처벌 대상 학생 150여 명의 명단을 학교에 통보하고 징계를 지시했다. 또한 조국수호협 소속 예비역 장성을 구속하고, 학생시위 선동을 빌미로 국립대 교수를 파면했다. 교수 징계에 미온적인 고려대, 연세대에 무기 휴업령을 내리고 감사에 착수했으며, 결국 일부 교수가 자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언론인과 야당 정치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등 박정희 정권은 전 방위적인 탄압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서울의 대학생들은 동맹휴학 등을 결의하며 투쟁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9월 16일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공식 해체시킨 데 이어 25일 한일협정반대투쟁을 배후 조종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극한적인 시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민비연 학생 10여 명을 구속했고 이날 위수령도 해제했다. 이것은 한일협정반대투쟁의 종결을 의미했다.주)010

결과/영향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은 민족주의 고양에 기여했다. 야권과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으로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굴욕적인 저자세로 진행한 한일회담을 비판하고, 민족주체성과 호혜 평등의 관계 확립을 촉구했다. 이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은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적 침략과 종속, 이로 인한 식민주의의 부활을 경계했다. 또한 집권 여당의 비민주적 날치기 방식의 한일협정 조인 및 비준을 규탄했으며, 군인과 경찰의 학원 난입, 정부의 학원 자율성 침해 등으로 유린당한 학원의 자유 보장, 집회·시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을 통해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인식하여 민족민주운동의 주체 역량을 결집하고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00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39-444쪽;허종, <1964∽1965년 대구지역의 한일협정 반대운동>, ≪대구사학≫ 106, 대구사학회, 2012, 284-286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45-447쪽;전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전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12, 68-69쪽;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제주민주화운동사≫, 선인, 2013, 69-71쪽;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 선인, 2016, 76-77쪽;허종, 앞의 글, 286-290쪽. 
주)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48-452쪽;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71-72쪽. 
주)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52-455쪽;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72-73쪽;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78-79쪽; 허종, 앞의 글, 291-295쪽. 
주)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55-457쪽. 
주)0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58-459쪽;허종, 앞의 글, 294-295쪽. 
주)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59-462쪽. 
주)008
≪경향신문≫, 1965. 8. 23.;전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69쪽;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80쪽. 
주)0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63-464쪽;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80쪽. 
주)0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464-468쪽. 
멀티미디어
  • 한일협정 가조인 보도
  • 한일협정가조인규탄시위에 나선 동국대생(≪사상계≫ 1965년 6월호)
  • 이화여대 6.23시위(≪사상계≫ 1965년 6월호)
  •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장(≪사상계≫ 1965년 10월호)
  •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하는 김종필. 새로 출범한 사토 내각도 한일회담에 적극적이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조국수호협의회가 주최한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조인반대시위 도중 사망한 동국대생 김중배 추도식(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반대 투쟁 강연을 듣고 있는 여성들(이화여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을 마치고 축배를 드는 한일 양국 대표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며 집회에 참여한 윤보선과 장택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플레이버튼
    한일협정 조인과 그 내용을 알리는 정부의 홍보 영상(국가기록원)
참고문헌
  • 경기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경기민주화운동사≫, 선인, 2017.
  •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20.
  •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 선인, 2016.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1, 돌베개, 2008.
  • 여정남기념사업회·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청춘, 시대를 깨우다≫, 삼천리, 2017.
  • 인천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인천민주화운동사≫, 선인, 2019.
  • 전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전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12.
  • 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제주민주화운동사≫, 선인, 2013.
  • 충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충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12.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남민주화운동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1.
  • 허종, <1964∽1965년 대구지역의 한일협정 반대운동>, ≪대구사학≫ 106, 대구사학회, 2012.
집필정보
집필자
허종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4-02-08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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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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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사상계≫ 196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