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1) 한일협정가조인저지·규탄투쟁
1964년 12월 재개된 한일회담이 급속히 진전되어 1965년 2월 서울에서 열릴 회담에서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한일회담 규탄 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 시나(椎名悅三郞) 외상이 한일협정 기본관계조약 가조인 차 방한한 것을 계기로, 2월 1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6.3항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학생, 야당도 일장기를 불태우는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한일회담을 규탄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2월 20일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가조인하고, 여러 현안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일본에서 한일 외상회담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한일 기본관계조약이 가조인된 후 잠잠하던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은 3월 일본에서 한일회담이 열리면서 재개됐다. 3월 범국민투위는 강연회를 열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과 정권 유지를 위해 굴욕외교에 나서고, 한일협정이 일본의 경제 침략을 허용할 것이라고 규탄하며 범국민적인 투쟁을 호소했다. 이어 목포, 부산, 춘천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성토대회를 이어갔다.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한일 외상회담이 열리는 3월 26일부터 한일협정이 가조인된 4월 3일까지 투쟁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동국대 학생들이 한일회담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광주에서도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감행했다. 대구의 대학생과 원주의 고등학생들도 박정희 정권의 무능력과 실정, 매국적인 한일협정을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거리시위를 벌였다. 특히 대구에서는 시청 광장에서 한 시민이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를 규탄하며 분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시위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개학 직후라는 학내 분위기와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한 학생들이 처벌받거나 졸업하여 학생들이 투쟁 역량을 다시 결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협정가조인저지투쟁이 주춤한 사이 4월 3일 한일 두 나라는 그동안 쟁점이던 어업 문제, 청구권 문제,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등을 일괄 타결하고 한일협정을 가조인했다. 박정희 정권은 예상되는 학생시위에 대해 강경한 대응 방침을 밝히고, 각 대학에 장학관을 파견하여 학생들의 동향 파악에 나섰다. 또한 시위가 일어난 대학의 총·학장을 비롯한 책임자의 엄중한 문책의 방침을 밝혔다.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자 야권과 학생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3월 개학 후 투쟁 역량의 결집에 집중하던 학생들은 각 학교별 분산적인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대학 연합의 투쟁 조직의 결성을 추진했다. 서울 소재 대학 학생 대표들이 ‘평화선사수학생연합투쟁위원회’(학연투위)를 결성했으며,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경북학생총연합회’ 결성을 결의했다.주)001
학연투위 투쟁 선언에 맞추어 4월 9일 동국대 학생들의 규탄 대회를 시작으로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 투쟁이 본격화됐다. 이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도 성토대회를 열거나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서울의 10개 대학 학생 50여 명이 연합 시위를 계획하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4월 13일에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였다. 4500여 명의 학생들이 각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후 거리로 진출하여 평화선 사수, 굴욕적 한일협정 무효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5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10여 명이 구속됐다. 시위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으며,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국회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와 가조인 철회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제주에서도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였다.
한일협정가조인규탄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박정희 정권의 탄압도 강화됐다. 4월 13일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중상을 입은 동국대의 김중배(金仲培) 학생이 15일 저녁 8시 경 사망하여 시위 양상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동국대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은 김중배 학생의 추도식을 열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렬해지고 고등학생으로까지 확산되자, 4월 16일 박정희 정권은 4월혁명 5주년을 앞두고 학생시위가 크게 일어날 것에 대비해 대학과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지시했다. 또한 학생과 시민을 위압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은 물론 공군 정찰기,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4월 19일 4월혁명 기념일에 서울에서는 대부분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 일부 대학에서 침묵시위가 있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제주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진 뒤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대구에서도 고등학생들이 4월혁명 기념식을 마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어 대구, 대전, 전주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진 후 평화선 사수,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보장, 구속 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하자, 시위가 일어난 학교들이 휴교에 들어갔다.
4월 22일 전국 대부분 학교의 휴교령으로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대구에서는 전날에 이어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마친 후 거리시위를 시도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거리로 진출하여 한일협정 반대, 학원 자유 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연이은 시위로 400여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다.주)002
한일협정가조인저지·규탄투쟁에서는 회담에 저자세로 임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협정의 주요 내용을 규탄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또한 한일회담에 개입하는 미국을 비판하고 박정희 정권의 폭력 진압과 학원 자율성의 침해를 규탄했다.
2) 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투쟁
한일 양국은 한일협정을 가조인한 뒤 정식 조인에 박차를 가했다. 야당 의원들은 4월 말 한일협정이 비준될 경우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으며, 범국민투위는 다시 전국을 순회하며 궐기대회를 열었다. 5월 부산과 광주에서 열린 궐기대회에는 수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으며, 궐기대회 후 일부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광주와 목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굴욕외교 반대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5월 18일 미국에서 박정희-존슨(Lyndon B. Johnson)의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서울대 학생들은 한일협정과 미국의 개입을 비판하는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였다. 학교 당국이 휴강 조치를 취하자, 학생들은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사찰 금지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5월 들어 대부분 휴교가 해제됐지만, 일부 학교를 제외하고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협정 내용에 대한 한일 정부의 입장 차이로 정식 조인이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시위 학생들의 징계, 학생회 간부를 비롯한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경찰과 학교 측의 집중적인 감시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6월 하순에 한일협정을 정식 조인할 것이라는 정부 방침이 알려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활동이 다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거리 시위와 단식농성을 벌였다.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호혜 평등의 한미행정협정 체결 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단식농성은 각 학교로 확산되어 6월 21일까지 전국 13개 대학 800여 명에 이르렀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을 하루 앞둔 서울 12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일제히 거리시위를 감행했고, 이날 시위로 9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전국 주요 대학은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예년보다 빨리 방학에 들어갔으며, 서울 50여 고등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6월 22일에는 전국에 갑호 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서울 14개 대학 학생과 고등학생 1만여 명이 제2의 을사조약 즉시 철회, 평화선 사수, 일본의 경제 침략 야망 포기, 한미 불평등 관계의 개선을 촉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 주변에는 시위 진압을 위해 무장 군인이 동원됐다. 인천과 제주에서는 대학생들이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인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대구와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이 매국외교 즉시 중지, 제국주의 세력 축출, 살인 원흉 엄중 처단을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도쿄에서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됐다.주)003
한일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인 6월 23일 서울에서는 대학별로 수백 또는 수천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지고 거리시위를 벌인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성토대회 후 투석전을 벌이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10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한일협정을 조인한 이동원(李東元) 외무부 장관이 귀국하는 6월 24일에는 서울, 대구, 부산, 대전에서 대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 철회, 구속 학생 석방, 폭력 경찰 엄단 등을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가지거나 시위를 벌였다.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와 단식농성이 이어졌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특히 서울, 대구, 전주, 충주, 논산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또한 고려대 학생들은 한일협정 무효 선언 및 협정식 화형식을 가진 후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확산하는 고등학생 시위를 막기 위해 휴교 조치와 가정실습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대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교사들도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은 일본 상품 축출, 외래품 사용 금지의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일본 상품 불매와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는 서명운동도 벌였다. 제주에서도 고등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가거나 시위를 시도했다.주)004
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투쟁에서는 평화선 사수, 일제의 경제 침략 저지, 한미 불균등 관계 개선 등을 촉구했으며, 강경한 대응과 학원 자유를 침해하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했다. 학생들은 시위, 단식농성, 화형식, 서명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