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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추진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1964년 1월 9일 일본 외무성에서 한일예비회담이 재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영어표기
The Bilateral Talks on the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한자표기
韓日會談推進
발생일
1951년 10월 20일
종료일
1965년 6월 2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대일청구권과 평화선 문제 등 한국과 일본 간의 각종 현안들을 처리하기 위해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기까지 14년에 걸쳐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에 벌인 제1~7차 한일회담을 말한다.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일 간의 첨예한 쟁점과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강경한 대일교섭 자세로 인해 오랜 시간이 소요됐으며, 조속한 타결을 위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굴욕적인 대일교섭 자세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일어나는 주요 계기가 됐다.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고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각각 지역 통합을 시도했다. 유럽에서는 군사적 측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의 결성과 서독의 재군비를, 경제적 측면에서는 마셜(Marshall Plan) 원조와 유럽 경제 통합 등을 진행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 통합 전략이 추진됐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일본의 비무장화, 재벌 해체, 민주화 등을 골자로 한 개혁을 추구했으나, 이를 곧 포기하고 일본의 재군비, 재벌 유지, 노조 탄압 등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로 점령 정책을 전환했다. 역코스로 재건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보루이자 지역 통합의 거점으로 부활했다.

일본의 부활을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요했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자연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배후지가 필요했다. 미국이 주목한 배후지는 ‘대동아공영권’, 즉 과거 일본의 식민지들이었다. 최초 배후지 후보였던 중국의 화북・만주가 공산화되자 다음 후보지로 떠오른 것은 동남아시아였다. 1940년대 말 미국은 일본에서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하나의 유기적인 지역공동체로 결합시키고, 일본을 동아시아의 ‘공장’으로 재건, 강화하려는 정책을 채택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커졌다.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제 한국은 동남아시아보다 더 중요한 일본의 경제적 배후지로 부상했다. 또한 한국은 미국이 직접 개입해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고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최전선이 됐다. 한국, 미국, 일본의 군사적 관계도 밀접해졌다. 1951년 9월 8일 평화조약에 서명한 미국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었고, 1954년에는 한국과 미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렇듯 미국이 추진한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은 동북아시아에서 ‘힘’에 의한 지역 통합과 ‘부(富)’에 의한 산업 연관을 통해 관철되기 시작했다.

원인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일본 중심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에는 몇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일본 중시 정책에 반발하면서 ‘반일’을 강조했다. 일본은 산업구조가 대외 확장으로 나설 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평화헌법 때문에 재군비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난항을 거듭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세계냉전의 성격이 크게 변화했다. 군사적 대치에서 ‘정치·경제 전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특히 제3세계 경제 발전을 둘러싼 체제 우월성 경쟁이 격화했다. 소련의 평화공세, 경제 공세에 대항해 제3세계 개발의 중요성이 부각했지만, 미국의 재정과 국제수지 악화는 재원 조달을 어렵게 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1957년부터 대외 원조를 줄이기 시작했고 대신 동맹국들에게 책임 분담을 요구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됨에 따라, 일본의 적극적 역할과 함께 높은 수준의 지역 통합이 요구됐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복구된 일본 경제도 국내시장에 기반을 둔 성장이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한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꾀했다. 그 결과 장기간 중단됐던 한일회담이 1950년대 후반 재개됐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도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를 둘러싼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 한일 양국은 회담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1960년대 들어 한일회담은 급진전했다. 이를 가능케 한 핵심 동인은 1961년에 집권한 미국 민주당 정부, 즉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와 뒤이은 존슨(Lydon B. Johnson) 행정부의 달라진 대외 정책이었다. 미국은 한일회담 전개 과정에서 막후 조정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동안 한일관계에서 완고한 자세를 견지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퇴장이라는 요인과 함께, 동북아를 매개로 한 국내 문제 해소라는 전략적 요구가 한일교섭을 확대시키는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경우 정당성 획득을 위한 민생고 해결과 경제개발 추진을 위해 자본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1960년대에 집권한 한국의 장면(張勉)・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제일의 목표로 삼고 미국의 일본 중심 지역 통합 전략에 호응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섭했다. 미국의 책임 분담 압력을 받고 있었던 일본도 교섭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청구권 문제가 1962년 해결된 이후에도 평화선 문제와 같은 민감한 쟁점들로 인해 협상은 더디게 진행됐다. 1963년 말부터 베트남 문제에 적극 개입한 미국은 일본에게 더 많은 책임 분담을 요구하면서 한일회담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전개

제1~4차 한일회담: 이승만 정권의 한일회담 진행과 대일 강경 정책

미국의 동북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진행했다.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의 주권이 회복됐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승전국의 자격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나, 영국과 일본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인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대일 강화조약에서 배제된 이승만 정권은 1952년 4월 28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전에 한일 간의 각종 현안들을 타결하기 위해 미국의 주선에 따라 일본과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은 소극적 자세를 보였지만 골칫거리였던 재일 한국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의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의 예비회담이 도쿄에서 시작됐다.

한일회담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예비회담은 1952년 2월 중에 본회담을 개최할 것과 본회담의 의제만 결정하고 끝났다. 예비회담의 합의에 따라 1952년 2월 15일 제1차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한일 양국 간의 국교 조정을 위한 기본조약 체결, 재일(在日) 한국인 법적 지위, 재산 청구권, 문화재 반환, 어업 문제, 선박 문제 등 여러 문제를 중심으로 교섭이 시작됐다. 제1차 회담이 시작됐지만, 청구권을 주장하는 한국과 역청구권을 주장하는 일본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또한 한국은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이전 한일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에 소극적이었다. 1953년 4월 제2차 회담도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인접 해양 주권 선언) 문제가 일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결렬됐다. 그리고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 나온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久保田貫一郞)의 “36년간(실제로는 35년간: 필자 주)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민족에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인해 한일회담은 장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주)001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지역 통합 요구가 한층 강해지면서 장기간 중단된 한일회담이 1957년의 예비회담을 거쳐 재개됐다. 그동안 협상의 걸림돌이었던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이 포기되고 구보다 망언도 취소됐다. 그리고 한일 양국은 억류자 상호 송환과 한일회담 재개를 규정한 협정 문서에 서명했다. 1958년 4월 15일 제4차 한일회담 본회담이 시작됐다. 하지만 제4차 회담은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커다란 입장 차이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59년 일본 정부가 한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재일 한국인들의 대규모 북송을 허용하자 회담은 곧 파국을 맞이했고, 1960년 4월혁명으로 인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중단됐다.

1950년대 한일회담의 난항에는 과거사와 각종 현안에 대한 일본 측의 무성의한 자세, 이승만 대통령의 비타협적인 대일 강경 정책 등이 원인이 됐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보다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얻어내려 했다. 이 대통령은 반공의 보루로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미국에게 보냈다. 동시에 미국이 한국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일본과의 협상에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임했다. 이 대통령은 한일회담에서 일본이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협상을 하려 했고,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한일관계와 한일회담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도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럼에도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일본 중심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은 더욱 강화됐다. 한일 간 각종 현안에서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이 대통령의 대일 강경 정책은 미국을 협상에 끌어들이지 못했으며 국제사회의 비난만 초래했다.

제5차 한일회담: 장면 정권의 적극적 교섭 시도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 7.29총선을 통해 장면 정권이 탄생했다.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과 달리 미국의 일본 중심 지역 통합 전략에 순응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권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원조 감소로 초래된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절실하게 원했다. 1960년 8월 24일 장면 정권은 ‘대일 외교 정상화’를 주요 외교정책으로 발표하고 곧 실행에 들어갔다. 역시 1960년 7월 새로 들어선 일본 이케다(池田勇人) 정권도 한일회담 타결에 의욕을 보였다. 이에 1960년 10월 25일 제5차 한일회담의 예비회담이 시작됐다. 제5차 회담에서는 이전과 달리 각 분과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핵심 쟁점인 청구권 문제는 과거 4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한 번도 실질적인 내용 토의에 들어가지 못한 채 법 이론 논쟁에 매달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청구권 분과위원회를 32차례 개최해 청구권 각 항목에 대한 실질적인 토의를 진행했다.

양국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제5차 한일회담은 빠른 진전을 보지 못했는데, 이유는 핵심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여전히 컸기 때문인 동시에 한일 양국 내부의 상황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1961년 2월 3일 국회(민의원)가 ‘한일관계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해 정부의 적극적인 한일 교섭에 제동을 걸었다. 이 결의안은 장면 정권이 지켜야 할 한일회담 원칙으로 다음 4개 항을 제시했다.

① 제한 국교에서 전면 국교로 나아갈 것
② 평화선은 국방 및 수산자원의 보존과 어민의 보호를 위해 수호할 것
③ 정식 국교는 일본이 우리에게 입힌 고통의 청산 후에 성립할 것
④ 현행 통상 외의 경제협조는 국교정상화 후에 할 것주)002

야당인 신민당이 주도한 국회 결의안은 당시 한국 국민이 한일회담에 대해 갖고 있었던 보편적 정서를 반영했다. 그중 ②와 ③은 평화선과 청구권 문제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러나 ②는 평화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③은 한국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일 청구권을 획득해야만 충족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민 여론과 국회의 견제는 장면 정권에게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고 회담은 그만큼 더디게 진행됐다. 제5차 한일회담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예비회담만 가진 채 본회담을 열지 못하고 유산됐다.

제6차 한일회담: 박정희 정권의 교섭 시도와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일본에 회담을 제의하자 일본은 미국과 협의한 후 한국의 요구에 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0월 20일 도쿄에서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됐다. 11월 2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 방문 길에 일본을 들러 이케다 일본수상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해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결과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이라는 원칙은 재확인했으나 1962년 2월 재개된 실무회담에서 각 현안에 대한 서로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쟁점은 청구권, 평화선, 독도 문제였다. 특히 청구권의 ‘명목’과 ‘액수’가 논란이 됐다. 한국은 실질적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청구권을 관철해 한국 국민에게 한일협정 체결과 일본 자금 유입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견해를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정이 한국 내 일본인 소유 재산을 한국에 이양함으로써 청구권은 사실상 소멸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제공할 자금의 명목을 ‘경제협력 자금’ 혹은 ‘독립 축하금’으로 규정하려 했다. 청구권 명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액수 문제였다. 제6차 회담이 시작될 즈음 한국은 일본에 8억 달러 정도의 청구권 자금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청구권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에 한해 처리할 용의가 있고, 경제개발을 위한 협력 자금 명목으로 5000만 달러 정도만 인정할 수 있으며 여기에 약간의 경제 원조가 가능하다고 대응했다. 이후 양국은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액수 차이를 줄여나갔다.

계속된 협상을 통해 양측 입장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최종적인 담판을 위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의장의 친서를 지니고 재차 일본을 방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회담했다. 1962년 10월 21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두 사람은 유명한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최종 합의를 끌어내었다. 이 메모에는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정부 차관) 2억 달러, 민간 차관 1억 달러 이상”이라는 총액의 대강이 명시돼 있었다. 반면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돼 있지 않았다. 이후 한국은 이 자금을 청구권 자금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은 일관되게 경제협력 자금 및 독립 축하금으로 해석했다.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이승만 정권의 배상권이라는 용어와 비교할 때 의미가 대폭 축소된 것이었다. 김‧오히라 메모 내용은 1964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2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결국 한일 양국은 1965년 체결된 청구권 관련 협정 제목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고 해, 자금 명목에 대해 양국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열어놓았다.

청구권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어업 문제, 즉 평화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한국 측은 애초 청구권과 어업 문제를 별개의 의제로 상정하고 40해리 전관수역과 1억 7800만 달러 규모의 어업 협력을 골자로 하는 안을 제시한 데 대해, 일본 측은 12해리 전관수역과 청구권 내에 어업 협력 자금을 포함할 것을 내세우며 한국이 어업 문제를 양보하지 않으면 청구권 타결도 결렬된다는 안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청구권과 평화선의 상쇄를 주장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권도 청구권 협상이 성공적으로 해결될 경우 평화선 문제에 대해서는 대폭적인 양보를 할 용의가 있었다.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되기 직전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령을 보내, 일본 측이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이면 어업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오히라 일본 외상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동안 평화선을 영해로 알고 있던 한국 국민은 평화선과 청구권 상쇄를 국토의 일부를 돈을 받고 팔아먹는 행위로 간주했다. 장면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선 문제는 한일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원한 박정희 정권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이로 인해 1963년 말까지 어업 문제 관련 전문가 회담, 비밀 절충, 밀담 등의 형태로 수십 차례 되풀이됐지만 협상 타결은 계속 유보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오노(大野) 일본 자민당 부총재가 ‘박정희와는 부자지간 같으며 한국은 원양어업이 필요 없다’는 취지의 ‘제2의 구보타 망언’을 함으로써 한국 국민의 반발을 고조시켰다.주)003

또한 일본은 1962년경부터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독도 문제는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니므로 국교정상화 후에 제3국(특히 미국) 거중조정 등 외교 계통을 통해 해결을 도모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에 한국이 확약해 줄 것을 요청했고 한국은 이를 거부했다.

1964년 들어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한일회담 타결 실패는 중국을 봉쇄하고 월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걸림돌인 평화선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곧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회담 타결이 임박해 오자 그동안 이 문제를 주시해오던 야당, 지식인, 그리고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1964년 3월부터 전면적인 반대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학원사찰 폭로, 그리고 부정부패 의혹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론이 점점 더 악화했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는 악화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공화당 의장으로 한일회담을 주도하던 김종필이 퇴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종필 의장과 대립하던 공화당 비주류는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해 김종필 의장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여기에 봄 가뭄과 매점매석으로 쌀값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5월 초 박정희 정권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졌다.

5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시국 수습을 위해 전면 개각을 단행하고 국무총리에 정일권(丁一權), 부총리에 장기영(張基榮)을 임명했다. 박 대통령은 정일권 내각의 첫 국무회의에서 “박력 있는 행정”을 강조했다. 정 총리도 취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6개월 또는 1년 내에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물러나겠다”는 결의와 함께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공언했다.주)004 미국과 일본 역시 정일권 내각을 ‘한일회담 촉진 내각’으로 파악하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1964년 1월 9일 일본 외무성에서 한일예비회담이 재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일권 내각은 ‘돌격 내각’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한일회담을 밀어붙였다. 정일권 내각 발족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은, 침체에 빠진 한일회담을 5월 하순부터 재개한다는 원칙 아래 일본과 교섭을 준비했다. 그 결과 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어업・평화선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한일 각료회담을 5월 20일경 열고 6월에 본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한일협정 조기 타결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학생들에 의한 반대운동의 열기 역시 점점 더 고조됐다. 이러한 열기는 5월 20일 ‘황소식(式)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쳐 6월 3일 대규모 시위로 폭발했다. 6.3시위에서 학생들은 ①박 정권 하야 ②악덕 재벌 처단 ③학원사찰 중지 ④여야 정객의 반성 촉구 ⑤민생고 시급 해결 ⑥부정부패 원흉 처단 등을 요구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임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시 전역 비상계엄 선포로 대응했다. 계엄 선포 뒤 군대의 힘에 의해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완전히 좌절됐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55일 동안 구속자는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그리고 언론인 7명으로 총 348명이었고,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재판에 회부된 피의자는 구속 172명, 불구속 50명이었다. 또한 이 기간에 포고령 위반으로 890건 1120명이 검거됐다. 그중에서 540명이 군사재판, 86명이 민간 재판, 216명이 즉결재판에 회부됐고, 278명이 방면됐다.
비록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좌절됐지만,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 반민족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또 한일회담이 계엄 선포 이후 무기 연기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타결 직전까지 갔던 한일회담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까지 발동했지만 한일협정 체결에 실패했던 것이다. 아직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대운동의 불씨는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제7차 한일회담: 한일협정의 체결

계엄 선포 직후 무기 연기됐던 한일회담은 1964년 12월 3일 재개됐다. 회담 재개에도 미국이 개입했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과 ‘북폭’으로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은 조속한 한일회담 재개와 타결을 촉구했다. 9월 하순부터 10월에 걸쳐 미 국무성 차관보 번디(McGeorge Bundy)는 일본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해 양국 고위 관계자들과 연쇄 회담을 갖고 한일회담 타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개입 강도는 더욱 세졌다. 특히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 평화선만 고집하지 말고 회담을 타결시켜 하루빨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동북아시아 안보 질서 강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11월 출범한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이 미국에 협조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결단하면서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될 수 있었다.

제7차 한일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65년 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의 연내 타결을 공언했다. 1월 12일 일본의 사토 수상이 미국을 방문해 존슨 미 대통령과 회담한 후 한일회담은 급속도의 진척을 보였다. 그러나 재계 거물로 일본 측 수석대표로 임명된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가 일본 기자들 앞에서 “일본은 분명히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조선을 보다 낫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을 것이다.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타당한 말이 아니다”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주)005 파문이 확산하자 1월 18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다카스기 일본 수석대표가 “내가 공산당이 좋아할 얘기를 하겠나? 내가 말했다는 그 보도는 어디서 나온 말인지 나도 모르겠다”며 발언 자체를 부인하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됐다. 다음날 한국 외무부는 “한일회담을 깨뜨리려는 음모를 가지고 다카스기 신이치 씨 발언을 조작·유포한 것”이라면서 다카스기 망언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주)006 한일회담 타결이 기정사실화한 상황에서 이 정도의 돌발 변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했다. 과거 한일 간에 맺었던 조약들의 무효 시점과 관련해서는 “이미 무효이다(are already null and void)”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이 문구는 쌍방의 주장을 절묘하게 절충한 것으로 양국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즉 한국은 ‘이미’라는 시점을 과거 각 조약의 체결 시점으로 해석해 ‘한일병합조약’도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로 해석해 한일병합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문구의 모호성과 해석의 자의성으로, 조속한 협상 타결을 위해 이런 모호한 방식으로 쟁점을 봉합하는 사례는 이후에도 계속 발견할 수 있다.

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2월 17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이 한국을 방문했다. 도착 성명을 통해 시나 일 외상은 “양국 간의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한다”고 했다. 시나 외상의 “불행한 기간”은 35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를 회피한 발언이자, 일본이 한국에 불행을 안겼다는 것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이동원(李東元) 외무부 장관은 환영사를 통해 “한일 양국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여 신의와 신뢰에 입각한 영속적인 우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주)007

기본조약 타결과 시나 일 외상 방한을 계기로 오랫동안 움츠러들었던 반대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격렬한 반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조약은 2월 20일 가조인됐다.

이제 남은 쟁점은 평화선 문제밖에 없었다. 기본 조약 가조인 직후 한일 양국은 평화선을 대체할 새로운 어업선 획정에 의견 접근을 보았다. 평화선은 이제 곧 없어질 운명이었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한일회담의 전면 타결이 임박하자 범국민투위는 다시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1965년 초까지 비교적 잠잠했던 대학생들도 성토에 나서기 시작했다.

야당을 비롯한 범국민투위와 대학생들의 총력 투쟁에도 불구하고 4월 3일 한일 양국은 ‘어업’, ‘청구권’,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의 협정에 가조인했다. 이로써 1951년 처음 시작한 후 14년 동안 재개와 중단을 반복해 오던 한일회담이 사실상 타결됐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평화선 문제도 결말을 보았다. 평화선 문제와 직결된 어업 협정의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 어민만이 배타적으로 어업을 할 수 있는 어업수역(전관수역)을 공해 부분을 포함해 12해리까지 설정하고, 40해리까지는 한국과 일본 어민이 같이 조업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했다. 평화선은 어업 협정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기본 조약과 마찬가지로 모호한 방식에 의한 쟁점 봉합이었다. 한일 어업 협정 체결로 평화선은 사실상 철폐됐고, 협정 체결 이후 한일 간의 평화선 분쟁은 사실상 종결됐다.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 가조인 이후 한일 양국은 조속한 정식 조인을 목표로 마지막 협상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야당 국회의원들은 4월 말 한일회담 비준 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고, 4월 중순 대학생들도 연일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의 폭력 진압에 의해 대학생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결국 주요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5월이 되자 범국민투위는 각 지방을 순회하며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갖기 시작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5월 16일 미국으로 떠났다. 여기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계속될 것임을 약속했다. 베트남전 전투병 파병 결정과 한일회담 타결의 대가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박정희 정권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도 그만큼 절박하게 진행됐다. 범국민투위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은 6월 22일 오후 5시 일본 도쿄에서 정식 조인됐다. 한일협정은 ‘한일기본조약’,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1조약 4협정으로 이루어졌다. 14년간 진행된 한일회담은 드디어 일단락됐다.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일협정 조인 이후 국회의 비준 과정

1965년 7월 12일 한일협정 비준을 위한 임시국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 18개 대학 교수 354명은 서울대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하고, 국회가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해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에도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비준 반대 요구가 계속됐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적극적인 비준 반대 요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7월 14일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베트남전 전투병 파병 동의안과 함께 날치기로 발의했다. 야당 의원들은 단상에 올라가 비준 동의안 발의를 육탄으로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7월 20일 박순천(朴順天) 민중당(1965년 제1야당인 윤보선(尹潽善)대표최고위원의 민정당과 제2야당인 박순천 대표최고위원의 민주당이 통합,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1주일의 냉각기를 가진 후 임시국회를 열어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논의하기로 합의한 후 민중당 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은 가속화했다. 여야 합의에 따라 7월 29일 임시국회가 열리고 비준 동의안을 심의할 특별위원회가 구성됐지만, 같은 날 민중당 강경파의 지도자였던 윤보선 민중당 고문은 당을 탈당하면서 “복수정당제를 규정하고 있는 현행 헌법에 비추어 야당 없는 공화당만의 국회가 비준을 강행한다면 명백한 위헌이며 국제관례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불법 처사이기 때문에” 탈당과 당 해체가 가장 유효한 투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주)008 이후 민중당에서는 강경파 의원들의 탈당이 잇달았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을 마치고 축배를 드는 한일 양국 대표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여야 합의로 국회비준특별위원회(특위)를 만들었지만 공화당은 8월 11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특위에서도 또다시 날치기로 전격 통과시켰다. 다음날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총사퇴를 결의하고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러나 강경파 의원들이 사퇴서와 함께 탈당계를 함께 제출한 반면, 온건파 의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했으나 정통 보수야당 수호를 명분으로 탈당에 반대했다. 야당 의원들이 총사퇴를 결의하고 국회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여당만의 일당 국회 본회의에서 8월 13일 베트남전 전투병 파병동의안,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각각 통과됐다. 그리고 1965년 12월 18일 한일 양국 정부가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발효됐다.

결과/영향

1951년 이래 14년간 지속한 한일회담은 1965년 드디어 타결됐다. 한일협정은 한국과 미국과 일본 정권의 이해관계가 삼위일체로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한국・미국・일본은 군사・경제적 차원에서 삼각동맹을 형성해 완결된 지역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 통합에서 한국은 미국-일본-한국이라는 위계질서의 가장 하단에 종속적으로 위치했다. 한국은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일본은 자본・설비・기술 등을 제공해 수직적 노동 분업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성은 심화됐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고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지역 통합 전략에 따른 각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1910년의 ‘한일병합’이 무효이며 35년 동안의 식민 지배가 잘못된 과거였음을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협정문 어디에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나 불법 점령에 관한 내용은 없으며, 해석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닌 협정이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일본이 과거의 식민 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본 정치인들의 각종 망언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3년 대통령 취임 경축사절로 내한했던 오노 일본 자민당 부총재의 “박정희 대통령과 나와는 부자지간이므로 한일관계가 잘될 것”이라고 한 오노 망언,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기 때문에 사죄할 필요가 없다며 “한국을 20년 더 지배했어야 했다”는 1965년 다카스기 망언, 그리고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범국민적으로 번지자 “한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한일회담을 종결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 시나 일 외상의 1965년 발언 등 모욕적인 망언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침탈한 나라와 침탈당한 나라가 국교를 정상화하려면, 침탈한 나라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 보편적 양심에 기반한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한일협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과 일본이 각기 그 명목을 달리 주장하는 청구권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인류 보편의 상식을 맞바꾼 것이다. 이에 더해 청구권 협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또한 과거 한국이 ‘주권’을 선언했던 평화선을 사실상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고유의 영토인 독도 문제마저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아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시도에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일 양국 간 독도 문제를 둘러싼 ‘밀약’이 있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무효 시점, 개인별 청구권,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독도 문제 등은 여전히 그 해결이 끝나지 않은 채 한일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주)001
<한일회담 우복(又復) 결렬>, ≪동아일보≫, 1953. 10. 23. 
주)002
<평화선 수호 강조>, ≪조선일보≫, 1961. 2. 3.(석간) 
주)003
<대일 저자세 부당>, ≪동아일보≫, 1963. 12. 18. 
주)004
<정일권 내각 발족>, ≪경향신문≫, 1964. 5. 11. 
주)005
<다카스기(高杉) 수석대표 중대 실언>, ≪동아일보≫, 1965. 1. 19. 
주)006
<다카스기(高杉) 대표 발언 문제 삼지 않아>, ≪경향신문≫, 1965. 1. 19. 
주)007
<시나(椎名) 일(日) 외상 입경>, ≪경향신문≫, 1965. 2. 17. 
주)008
<윤보선 고문, 민중당 탈당 성명>, ≪경향신문≫, 1965. 7. 29. 
멀티미디어
  • 1964년 1월 9일 일본 외무성에서 한일예비회담이 재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을 마치고 축배를 드는 한일 양국 대표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 참석자들이 강연을 마친 함석헌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며 집회에 참여한 윤보선과 장택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예비회담 광경
  • 한일협정 예비회담에서 회담 관련 문서를 교환하는 양측 대표
  • 일본에서 한일비준에 대한 반대 데모
  • 한일협정 비준 이후 대면한 양측 대표단
참고문헌
  • ≪고대신문≫
  • ≪국회회의록≫
  • ≪외무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문서≫
  • 대한민국 정부, ≪한일회담 백서≫,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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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도성, ≪박정희와 한일회담≫, 한송, 1995.
  • 이원덕, <한일협정의 경과>, 민족문제연구소 편,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 이종원,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 민족문제연구소 편,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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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제연, <평화선과 한일협정> ≪역사문제연구≫ 제14호, 역사비평사, 2005.
  • Bruce Cumings, Power and Plenty in North-East Asia : The Sources of US Policy and Contemporary Conflict, A. Mack & P. Keal, Eds., Security and Arms Control in the North Pacific, London, Unwin Hyman, 1988.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0: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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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1964년 1월 9일 일본 외무성에서 한일예비회담이 재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경향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