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제1차 민비연사건 공판 현장
유형
단체
분류
통일운동
동의어
민비연
영어표기
The Group of Comparative Study of Nationalism
한자표기
民族主義比較硏究會
결성일
1963년 10월 4일
해체일
1965년 9월 16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서울

개요

196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결성된 이념서클이다. 연구회를 표방하며 합법적으로 학생운동 기반을 확대하고 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타 학교 이념서클과 접촉하고 시위를 계획하는 등 학생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4월혁명 이후 대학생들의 현실 참여 의지가 폭발적으로 분출했고, 이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한국사회의 후진성 타파를 위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후진성의 근본 원인으로 분단을 지목하고, 해결방안으로 통일이념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민통련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로 수렴됐는데, 이후 민통련 내부에서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의 분열이 심화했다. 조직적 균열이 심화한 상태에서 민통련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맞아 붕괴했다. 민통련에 적극 가담한 이념서클 역시도 더 이상 존립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조직 붕괴 이후에도 이념서클과 민통련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대학 내에 남아 있었다.

설립 과정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결성이 이루어지기까지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1962년 6월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이었다. 1962년 5월 파주에서 미군 장교 등 6명이 한국인을 절도로 몰아 린치를 가해 결국 사망케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6월 6일 고려대 학생들이, 6월 8일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각각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성을 내세우며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5.16쿠데타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서울대의 경우 이종률(李鍾律)을 비롯해서 당시 정치학과 2학년이었던 김중태(金重泰), 현승일(玄勝一), 김도현(金道鉉)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다음 해인 1963년 3월 군정연장반대시위에도 앞장섰다. 이들이 바로 민비연을 창립하고 주도한 핵심세력이었다.

또 다른 계기는 1963년 5월 23일 서울대 문리대 축제(학림제) 당시 ‘한국적 민족주의의 진로’라는 논제로 사회학과가 주관한 토론대회였다. 이날 토론대회에는 정치학과 이종률, 사회학과 이경재, 조봉계(趙奉烓), 영문과 정기인, 그리고 법대의 김영철 등이 발표를 맡았는데, 훗날 민비연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런 모임 등을 통해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체계적인 지식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단체 활동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창립과 이념적 성향

1963년 10월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고립적, 일방적 전근대적 강의의 맹점을 탈피하고 여러 나라 민족주의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여 민족사적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한국적 민족주의 이념을 모색, 정립하겠다”는 요지의 창립 선언문을 채택하는 한편, 회장 이종률, 총무부장 박범진(朴範珍), 연구부장 김경재, 기획부장 김승의 등 임원을 선출했다.주)001 초대 집행부는 대부분 정치학과 학생들이었고, 지도교수는 민족주의 강의로 인기를 얻고 있던 황성모(黃性模) 사회학과 교수가 맡았다. 회원은 약 50~60명 정도였다. 창립 당시 민비연의 주요 활동 목표는 첫째, 가능한 대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학생운동의 기반을 넓히자, 둘째, 연구발표회나 세미나를 통해 학술적 이념적 지표를 확립하자, 셋째, 민정 이양에 대비해 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정립하자 등이었다.

민비연 학생들은 민주사회주의,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밖에도 해방 전후에 나온 좌익 관련 서적, 그리고 일본에서 들어온 서적 등을 함께 읽는가 하면 마오이즘에 관한 관심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비연 학생들의 이념적 관심과 독서 경향은 과거 1950년대 신진회 선배들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즉 민비연이 신진회를 조직적으로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념과 사조의 맥을 잇고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수백 권의 좌익 서적이 암암리에 보관, 관리되고 있었고, 그 책들을 신진회, 민통련 선배들은 물론 민비연 후배들도 계속 이어서 보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현승일은 ‘좌익 서적을 포함한 포대 혹은 마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주)002 물론 현승일이 강조하듯 민비연 학생들이 이 좌익 서적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좌익 서적의 존재와 계승이 민비연 학생들을 다른 이념서클 학생들보다 더욱 진보적인 입장으로 기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민비연은 창립 직후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창립 직후에 나온 ≪조선일보≫의 보도였다. ≪조선일보≫는 민비연의 창립 소식을 전하면서 “그런데 이 학생들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순수한 학술그룹인지 또는 어떤 행동을 전제로 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연구발표회, 연구지 발간, 강연회 등에 쓰일 돈의 출처도 밝혀져 있지 않다”고 의혹을 제기했다.주)003 민비연이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학생 정치 조직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이에 민비연 학생들은 자신들은 “순수한 학술단체”이며 회비는 60명 회원이 매달 50원씩 내어 프린트한 회지를 발행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주)004

민비연의 창립 이후 활동을 보았을 때 이러한 의혹은 신빙성이 없다. 단,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측면에서는 1963년 창립 당시 민비연이 박정희 정권과 일정한 공유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민비연 학생들뿐만 아니라 당시 다른 많은 학생들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민비연은 출범 직후인 1963년 11월 5일에 한일회담의 막후 실력자였던 김종필(金鍾泌) 전 민주공화당 의장 초청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공화당이 표방한 민족주의의 본질과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그것과의 차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종필은 공화당의 민족주의는 우리의 주체성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며 반공이 민족주의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또한 민족 개념이 남북한 전민족을 말하는 만큼, 남한의 실력 배양으로 자력에 의해 통일을 하자는 것은 모순이 아닌지 따졌다. 이에 김종필은 자체 실력을 대를 이어 계속해야 하며 북한에게 우리 민족을 넘겨 줄 수 없다고 답했다.주)005 이 토론회에 대해 김종필은 대학생들에게 당했다고 하면서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을 후회했지만, 대학생들 역시 군부 쿠데타 세력에 말려들어 스스로의 역부족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주)006
민비연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 초청 토론회 보도.(대학신문)

1964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주도

민비연 창립 이듬해인 1964년 김중태가 2대 회장이 되면서 주도권이 김중태, 현승일 등 61학번들에게 넘어갔다. 3.24시위 직전에 3대 회장으로 현승일이, 5.20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에 앞서서는 조봉계가, 6.3시위 직전에는 박지동(朴智東)이 회장으로 선임됐다. 본격적으로 한일협정반대운동의 포문을 연 3.24시위를 주도한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핵심 구성원들은 이미 1962년 6월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 때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바 있었다.

민비연은 당시 한일 간에 추진되고 있던 국교 정상화 협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국민 사이에 반일 감정이 상당히 높은 상황에서 정부의 협상 태도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민족적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민족주의도 그 진정성이 의심됐다. 학생들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이 민비연 모임 안에서 커졌다. 특히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한 채 무상원조 3억 달러를 받는 대가로 해양 주권선인 ‘평화선’을 팔아넘기는 박정희 정권에 민비연 회원은 물론 대다수 학생이 분노했다.

결국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학생 5000여 명이 동시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서울대의 경우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라는 조직이 3.24시위를 비롯한 1964년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 조직은 민비연 회원들과 서울대 문리대 신문사 ≪새세대≫를 중심으로 결집한 학생들이 연합해서 만든 투쟁위원회였다.

타 이념서클과의 접촉과 동시 시위 계획 및 추진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는 5.16쿠데타 이후 암중모색 중이었던 학생운동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시위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동시다발적인 시위로 이루어졌다. 물론 1960년 4월 19일의 항쟁도 수많은 학교들의 동시다발 시위로 이루어졌지만, 당시 시위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3.24시위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개 학교의 사전 접촉과 연계 속에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다. 이 배경에는 이전부터 각 대학 이념서클 간에 만들어진 일정한 네트워크가 작동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울대 민비연과 고려대 이념서클인 민족사상연구회(민사회)의 관계였다.

서울대 민비연 회원들은 일찍부터 고려대 민사회 회원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63년 11월 서울대 학생들과 고려대 학생들의 공동 학술토론대회 추진이었다. 토론회는 이념서클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가다듬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대 민비연 회원과 고려대 민사회 회원도 공동 토론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접촉을 시작했다.

공동 토론회는 1963년 11월 12일 개최 직전 정부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공동 학술토론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서울대 민비연과 고려대 민사회 사이의 네트워크는 다음 해인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대규모 시위를 동시다발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 사이의 접촉은 1963년 12월 정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서울대 민비연의 김중태와 고려대 민사회의 최장집(崔章集)이 접촉했으나, 고려대 측에서 상대적으로 이념성이 강한 김중태를 기피하면서 서울대 민비연의 접촉 창구가 이원재(李源載)로 바뀌게 됐다. 이후 최장집은 연세대 이념서클인 한국문제연구회의 정준성과 접촉해 3개 대학의 동시 시위가 합의됐다. 합의 시점은 3.24시위의 2주 전 정도였다.

결과/영향

서울대 민비연 학생들은 한일회담반대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비민주적 행위를 규탄하는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민비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공안 기관의 요시찰 조직이었다. 민비연은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 1965년 한일협정조인·비준 반대운동, 1967년 동백림사건 등과 연관해 세 차례에 걸쳐 탄압을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민비연은 반국가단체로, 한일회담반대운동 배후조종,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불법 가두시위를 주도함으로써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은 민비연 회원을 간첩 혐의로 구속한 것은 잘못이었음을 시인했다.주)007
1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차 민비연사건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절정을 이룬 6.3시위 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항쟁에 적극 가담했던 많은 학생들은 ‘내란죄’ 등의 혐의로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념서클 회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대 민비연은 3.24시위는 물론 1964년 5월 20일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주도하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상징하는 이념서클로 부각되어 더 철저히 탄압당했다. 회원들에 대한 처벌은 물론 민비연 조직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 계엄령 선포 이전부터 정부는 민비연이 과거 민통련의 후신이며 사회주의 찬동자로 외부의 혁신 세력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비난했다. 이에 민비연은 성명서를 발표해, 민비연 일부 회원들의 시위 주도는 민비연 차원이 아닌 개별적 행동에 불과하며 정부의 비판은 매카시즘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1964년 6월 3일 계엄령 선포 후 한동안 민비연은 서울대 문리대 당국에 의해 학생단체로 등록이 보류됐다가 1964년 11월 27일 돼서야 보류 조치가 해제됐다.

2차 민비연사건

2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어렵게 다시 문을 연 민비연은 1965년부터 일상적인 학술 강연회와 세미나를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이 시작되고 이 운동이 1965년 8월 26일 위수령 발동을 통해 탄압을 당하는 과정에서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1965년 9월 16일 강제로 해산당했다. 얼마 후 중앙정보부는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 및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민비연 학생 11명을 구속 기소하고 6명을 수배했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학생조직인 민비연은 이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 날 학원과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위수령도 해제됐다. 같은 날 이루어진 민비연 해체와 위수령 해제는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종결을 상징했다.

3차 민비연사건

3차 민비연사건 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한 황성모 서울대 교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7년 민비연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3차 민비연사건’을 겪게 된다. 1967년 7월 11일 중앙정보부는 동백림사건 2차 발표를 통해 민비연의 지도교수인 황성모 교수가 서독 유학 시 동베를린을 방문해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으로부터 북한 찬양 선전 및 교양 훈련을 받고 공작금을 받는 등 간첩으로 활약했고, 1963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을 모아 민비연을 발족시켜 북한의 지령을 수행했다고 발표했다.

사건 발표 후 황성모 등 민비연 관련자 7명이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1967년 12월 16일 1심 판결은 민비연을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학술단체로 규정했다. 이에 관련자 7명 중 5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단, 황성모와 김중태에게는 경미한 반공법 위반 사실이 인정되어 실형이 선고됐다. 이후 재항소심과 재상고심을 거쳐 최종적으로 3명에게 유죄가 확정돼 황성모와 김중태는 각각 징역 2년, 현승일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만기 복역했다. 확정된 형량은 중앙정보부의 간첩 사건 발표나, 검찰의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민비연을 동백림사건과 무리하게 엮으려 한 이유는 대학생 데모의 배후에 황성모와 같은 지도교수, 더 나아가 북한의 사주가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동백림사건 당시 중앙정보부가 그린 ‘북한→지식인→학생’의 ‘조직도’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 조직도의 배후와 연결 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황성모는 동베를린에 단 한 차례 잠깐 들렸을 뿐 북측과 어떠한 접촉도 갖지 않았다. 게다가 민비연은 황성모가 만든 단체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중앙정보부는 고문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그린 조직도를 완성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부풀릴 만한 작은 실체조차 찾기 어려웠다. 결국 민비연사건은 기소 단계부터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해 동백림사건과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주)001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창립>, ≪대학신문≫, 1963. 10. 7. 
주)002
<현승일 구술>(구술일시: 2007년 5월 26일, 면담자: 오제연). 
주)003
<‘민족주의이념’ 학원으로, 서울대에 연구회>, ≪조선일보≫, 1963. 10. 9. 
주)004
<순수한 학술단체-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천명>, ≪조선일보≫, 1963. 10. 10. 
주)005
<김종필씨 서울대생 간의 정치토론 내용>, ≪동아일보≫, 1963. 11. 6;<김종필씨, 문리대생과 토론회>, ≪대학신문≫, 1963. 11. 7. 
주)006
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1991, 174쪽. 
주)007
김형욱, ≪김형욱 회고록≫ 2, 문화광장, 1987, 194~199쪽. 
멀티미디어
  • 민비연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 초청 토론회 보도.(대학신문)
  • 3차 민비연사건 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한 황성모 서울대 교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2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선고공판에서 판사의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의 민비연 피고들 모습
  • 항소심 선고를 받는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 피고들
  •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3명에 대해 내란죄를 적용했던 검찰의 공소장 변경 서류.(김도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신동아≫, ≪대학신문≫, ≪고대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 김영배 구술(구술일시: 2013년 8월 26일, 면담자: 신동호).
  • 김도현 구술(구술일시: 2008년 11월 26일, 면담자: 김주관).
  • 최장집 구술(구술일시: 2013년 10월 12일, 면담자: 신동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예문, 1996.
  •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 오제연, <동백림 사건의 쟁점과 역사적 위치>, ≪역사비평≫ 119, 역사비평사, 2017.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0:43:15
상위사건 + 더보기
한일회담반대운동
주요사건 + 더보기
3.24시위
학원사찰규탄운동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서울대문리대집단단식농성
6.3시위
배경사건 + 더보기
한일회담 추진
단체 + 더보기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연계자료 + 더보기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서울 문리대 민비연사건 전원에 무죄 선고>, 《경향신문》, 196...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김중태피고 등 사실심리>, 《경향신문》, 1964. 7. 27.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민비연」 내란음모혐의사건 6명 모두 실형 구형>, 《경향신문》,...
[대학신문]민비연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 초청 토론회 보도.(대학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내란 혐의에 무죄>,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현승일군 자진출두>, 《경향신문》, 1964. 5. 30.
선고공판에서 판사의 선고가 내려...
항소심 선고를 받는 민족주의 비...
2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1차 민비연사건 공판(경향신문사...
3차 민비연사건 재판에 피고인으...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3...
지도 + 더보기
고려대학교
민족사상연구회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터
연세대학교
...

...
제출 중입니다...
#
민족주의비교연구회
  • 설명 제1차 민비연사건 공판 현장
  •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