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창립과 이념적 성향
1963년 10월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고립적, 일방적 전근대적 강의의 맹점을 탈피하고 여러 나라 민족주의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여 민족사적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한국적 민족주의 이념을 모색, 정립하겠다”는 요지의 창립 선언문을 채택하는 한편, 회장 이종률, 총무부장 박범진(朴範珍), 연구부장 김경재, 기획부장 김승의 등 임원을 선출했다.주)001 초대 집행부는 대부분 정치학과 학생들이었고, 지도교수는 민족주의 강의로 인기를 얻고 있던 황성모(黃性模) 사회학과 교수가 맡았다. 회원은 약 50~60명 정도였다. 창립 당시 민비연의 주요 활동 목표는 첫째, 가능한 대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학생운동의 기반을 넓히자, 둘째, 연구발표회나 세미나를 통해 학술적 이념적 지표를 확립하자, 셋째, 민정 이양에 대비해 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정립하자 등이었다.
민비연 학생들은 민주사회주의,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밖에도 해방 전후에 나온 좌익 관련 서적, 그리고 일본에서 들어온 서적 등을 함께 읽는가 하면 마오이즘에 관한 관심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비연 학생들의 이념적 관심과 독서 경향은 과거 1950년대 신진회 선배들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즉 민비연이 신진회를 조직적으로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념과 사조의 맥을 잇고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수백 권의 좌익 서적이 암암리에 보관, 관리되고 있었고, 그 책들을 신진회, 민통련 선배들은 물론 민비연 후배들도 계속 이어서 보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현승일은 ‘좌익 서적을 포함한 포대 혹은 마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주)002 물론 현승일이 강조하듯 민비연 학생들이 이 좌익 서적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좌익 서적의 존재와 계승이 민비연 학생들을 다른 이념서클 학생들보다 더욱 진보적인 입장으로 기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민비연은 창립 직후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창립 직후에 나온 ≪조선일보≫의 보도였다. ≪조선일보≫는 민비연의 창립 소식을 전하면서 “그런데 이 학생들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순수한 학술그룹인지 또는 어떤 행동을 전제로 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연구발표회, 연구지 발간, 강연회 등에 쓰일 돈의 출처도 밝혀져 있지 않다”고 의혹을 제기했다.주)003 민비연이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학생 정치 조직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이에 민비연 학생들은 자신들은 “순수한 학술단체”이며 회비는 60명 회원이 매달 50원씩 내어 프린트한 회지를 발행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주)004
민비연의 창립 이후 활동을 보았을 때 이러한 의혹은 신빙성이 없다. 단,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측면에서는 1963년 창립 당시 민비연이 박정희 정권과 일정한 공유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민비연 학생들뿐만 아니라 당시 다른 많은 학생들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민비연은 출범 직후인 1963년 11월 5일에 한일회담의 막후 실력자였던 김종필(金鍾泌) 전 민주공화당 의장 초청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공화당이 표방한 민족주의의 본질과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그것과의 차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종필은 공화당의 민족주의는 우리의 주체성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며 반공이 민족주의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또한 민족 개념이 남북한 전민족을 말하는 만큼, 남한의 실력 배양으로 자력에 의해 통일을 하자는 것은 모순이 아닌지 따졌다. 이에 김종필은 자체 실력을 대를 이어 계속해야 하며 북한에게 우리 민족을 넘겨 줄 수 없다고 답했다.주)005 이 토론회에 대해 김종필은 대학생들에게 당했다고 하면서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을 후회했지만, 대학생들 역시 군부 쿠데타 세력에 말려들어 스스로의 역부족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주)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