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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서울대생들이 5.25난국타개총궐기대회 후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경향신문, 1964.5.25.)
유형
사건
분류
학생 운동
영어표기
The May 25 National Student Break-through Rally
한자표기
五二五難局打開學生總蹶起大會
발생일
1964년 5월 25일
종료일
1964년 5월 26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서울, 부산, 춘천

개요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 과정에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비민주성, 반민족성이 노골화되면서 그동안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각 대학 학생회들이 1964년 5월 25일 전면에 나서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궐기대회 이후 학생들은 1주일간 행동을 유보하기로 함으로써 6.3시위로 이어지는 대규모 항쟁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배경

1963년 12월 학생 여론의 결집을 위해 서울 시내 18개 대학 학생회장들이 모여 한국학생총연합회(한학련) 발기인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1964년 3월 대의원 총회를 열기로 하고, 대의원 비율을 종합대학 5명, 단과대학 3명으로 결정했다. 또한 경비는 독지가로부터 무조건부로 받은 뒤 차후에 갚기로 했다. 1964년 3월 30여 개 대학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대의원총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총회 준비 및 사무실 유지비 15만 원이 공화당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자금 유입이 1963년 12월에 정한 원칙을 어긴 것인지를 두고 내부에서 어용성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해 조직 결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학련 결성에 실패한 각 대학 학생회는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했다. 간혹 학생회가 운동의 구심점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회는 온건 노선을 지향하며 운동에 소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 학생회 모두 시위에 소극적이었지만, 연세대는 총학생회가 적극적인 편이었다. 고려대는 총학생회는 소극적이었으나 일부 단과대 학생회가 연합해 시위를 주도했다. 이렇듯 다양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학생회는 운동의 중심에 있지 못했고, 학생회와 관계없이 각 대학에 만들어진 다양한 투쟁위원회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3.24학생시위 당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주도로 서울대에서 만든 ‘대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주관한 대학 연합 투쟁위원회인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 6.2고려대생시위 당시 결성한 ‘구국투쟁위원회’ 등이 대표적인 투쟁위원회였다. 심지어 일부 학생회는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으며 학원사찰과 정치공작에 협조하기도 했다.

원인

‘난국 타개’를 외치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5.20시위 직후 표면화했다. 학원 내에서 경찰의 최루탄이 발사되고 수업 중인 강의실에 경찰이 뛰어드는가 하면 교수와 학생이 구타당하고 일부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해 휴교 조치설까지 번지는 등 학원의 자유를 짓밟는 일련의 긴박감은 공동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고, 동시에 정부의 근본적 혁신책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곧 경찰의 수배를 받아 잠적하거나 체포됐다. 이때부터 각 대학 학생회가 전면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 반민족성이 분명해지고 학생과 정부의 충돌이 격화하자 학생회도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과거 한학련을 조직하려 했던 학생회들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개

5월 22일 밤 서울 종로 광교다방에 8개 대학 학생회 간부들이 모여, 25일 오전 11시 대학별로 교정에서 대대적인 학생총궐기대회를 벌이기로 토의했다. 가두시위를 자제한 것은 혼란된 정국에 불씨를 던지지 말자는 의도에서였다. 23일 수도사대(현 세종대)에서 전날보다 6, 7개 대학의 학생회장단이 더 참가한 가운데 공동의 계획을 구체화했다. 이 자리에서는 난국타개궐기대회를 성토로 그칠 것이냐 가두로 나갈 것이냐 양론으로 나뉘게 됐지만 성토까지를 원칙으로 한다는 온건파의 의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24일 고려대에서 모인 20여 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각 대학에서 내놓은 초안을 절충해 선언문, 결의문(대정부 경고문 포함),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행동강령 등의 문안을 다듬었고, 각 학교 마다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란 플래카드를 한 개씩 만들기로 했다.

5월 25일 오전 경찰은 총궐기대회가 반국가적인 성격을 띤 혐의가 있는 것으로 단정, 2000매에 이르는 ‘구국비상결의선언문’을 압수했으며, 각 대학 학생 대표 17명을 종로경찰서로 전원 연행해 2시간여 조사 끝에 석방했다. 경찰은 총궐기대회에서 채택될 ‘구국비상결의선언’ 제5항 “친진보 반보수의 거센 4.19, 3.24 열풍에 반진보 친보수의 악랄한 편승 흉계를 파쇄하라”란 문구를 국시를 위반한 용공성이 있는 것으로 단정했다. 연행된 학생 대표 17명은 말썽이 된 선언문의 내용을 삭제하기로 확약한 뒤 풀려나왔다. “친진보 반보수”의 문구를 기초한 안성혁(安聖爀, 연세대 총학생회장)은 친진보 반보수의 뜻은 “정치적으로 수구의 개념에 반대되는 진취적이라는 뜻이며 경제적으로는 매판재벌에 대한 민족자본으로 해석한다. 용공적인 내용이 아니다”고 밝혔다.주)001
서울대생들이 5.25난국타개총궐기대회 후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경향신문, 1964.5.25.)

5월 25일 서울, 부산, 대구, 춘천 등 전국 30여 개 대학 학생회는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5월 25일과 26일 각 대학별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가졌다. 25일 정부 당국의 수차례에 걸친 강경한 경고와 각 대학 학생 대표들의 사전 연행 등 초긴장 상태에서, 서울의 경우 9개 대학교 약 4000명이 대회를 열고 구국비상결의선언, 행동강령 등을 채택했다.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는 서울대 학생 일부가 가두시위에 나선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교에서 학내 집회 형식으로 치렀다. 여기서는 굴욕적 한일회담, 박정희 정권의 실정,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학원사찰 등을 규탄했다. 서울에서 서울대생 약 500명, 고려대생 1200명 및 동국대, 연세대, 국학대, 국민대 등의 학생들도 각각 교내에서 대회를 열었다.

지방에서는 부산의 동아대 학생 4000여 명이 성토 및 궐기대회를 열고 경찰관의 학원 난입, 무장군인의 사법부 침입, 한일굴욕외교 반대, 민생고 문제, 구속 학생 석방,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등을 규탄하고 사법권 독립 유지에 대한 궐기를 했다. 춘천교대 교정에서는 학생 300여 명이 “구속 학생 즉시 석방하라”, “사법권을 보장하라”는 등 요지의 선언문을 발표한 뒤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네 차례 경찰과 충돌, 학생 80여 명이 연행됐다.

서울대

문리대, 약대, 법대, 미대 등의 대학생 약 500~800명이 문리대 구내,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 모여 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에는 “학원의 자유를 사수하자”, “구속 학생 및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 “폭력 정치 집단은 자폭하라”는 등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정복을 입은 경찰 대신 다수의 사복 경찰들이 포진해 있었다. 대회는 혁명기념탑 앞에 무릎을 꿇고 4년 전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산화해간 선배들에게 1분간 묵념을 올림으로써 시작됐다.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金德龍)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법대 3년 이양희(李良熙)의 비상결의문 낭독으로 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대회를 마친 서울대 학생 가운데 50~150여 명은 “양심은 반항한다. 1주일은 참을 수 없다”는 자유수호투쟁선언을 한 뒤 교문을 나와 데모에 돌입했다. 이들은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 재벌 잡아먹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종로5가 쪽으로 행진했다. 거리를 나서며 데모 학생 수는 약 300명으로 불어났고 학생 주위에 시민 약 200명도 가세했다. 경찰은 처음에 아무 반응이 없다가 종로5가 로터리와 효제국민학교 앞에 집결해 대비 태세를 취했다. 종로5가까지 오는 동안 시민 전부와 대부분의 학생들은 흩어지고 문리대, 법대생 약 50명만 남아 경찰 저지선에 걸리자 연좌데모를 시작, 약 5분 동안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새로운 자세로 임하라”, “무저항으로 투쟁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종로5가와 미대 앞 양쪽에 대기 중이던 300여 경찰기동대에 포위돼 김진혁(문리대 영문과 4학년) 외 학생 약 50명이 무저항으로 경찰 버스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됐다.주)002

서울대 미대 교정에서는 100여 명의 여학생을 포함한 200여 학생들이 ‘야만경찰학원난입난동규탄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5.20시위 때 4차에 걸쳐 경찰관들이 학내로 진입해 강의실을 짓밟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폭언 폭행한 경위를 낱낱이 들어 경찰의 비행을 따진 뒤, 이들을 색출 엄단 처치하라는 등의 결의를 했다. 대회를 마친 미대 학생들은 거리로 나서 종로5가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에 의해 남학생들이 연행됐다.

동국대

동국대 학생 약 500명은 중앙 강당에 모여 민주주의 및 민권수호 궐기대회를 열고 “①(서울대) 미대 침입 경관을 엄단하라 ②YTP(Young Thought Party, 청사회) 폭로자의 린치 사건을 규탄한다 ③사법부에 침입한 무장군인을 엄중 처단하라 ④5.20데모 주동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⑤순수한 학생과 국민의 여론을 존중하여 정책에 반영하라”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강당 입구에 “잡아다 어쩔텐가 어서 석방하라”, “정부는 폭력을 즉시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작된 대회는 오후 2시에 끝났고 학생들은 모두 해산했다.주)003
1964년 5월 25일 고려대 난국타개궐기대회 집회(고대신문)

고려대

총궐기대회는 약 12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회사 및 선언문 낭독, 결의문 낭독, 기조선언문 낭독 순으로 진행되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성토대회에 들어간 학생들은 현재 데모 원인은 민생고에 있으므로 “경제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경제사범을 엄중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법부 침입 군인들을 ‘근무지이탈죄’로만 다스리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성토했다. 대회를 마친 고려대생들은 그들의 주장이 관철될 계기가 마련될 것인지 지켜 보기 위해 이날은 데모를 하지 않고 해산, 일주일 후에 데모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주)004

구국비상결의선언문 발표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에서 작성한 ‘구국비상결의선언문’은 ①부정부패의 규명과 사죄, ②학원 난입 경찰 처벌, ③법원 난입 군인 처벌, ④구속 학생 석방, ⑤민생고 타개를 위한 독점・매판자본 몰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구국비상결의선언문’
민족의 오천년 역사를 왜곡되게 하느냐? 정의와 자유의 힘으로 삼천만 민족의 운명을 봉건 외압 독재 신식민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느냐? 하는 국가 초비상 시 우리 전국 백만 청년학도는 다음과 같이 결의 선언한다.
1, 현 위정자는 5.16 이후 감행된 수많은 부정부패 행위를 철저히 규명하여 국민 앞에 사죄하라.
1, 신성한 학원을 침입한 경찰을 즉각 파면하고 관계 책임자를 즉시 엄단하라.
1, 새벽에 법원을 강간한 일부 무법 ‘태로’(테러: 집필자) 군인과 관계 책임자를 즉시 엄단하라.
1, 구속 중인 애국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1, 파국에 직면한 민생고 타개는 망국 독점 매판 재벌의 엄단 몰수로부터 출발하라.
1, 정치자금을 양성화하는 입법 조치를 하라.
1, 위험천만한 비상시국을 조성하는 과장된 포고나 무근거한 과장선동을 지양하라.
1, 진정한 학생의 외침이 퇴폐 타락한 구 정객들이나 몰지각한 일부 정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며, 여하한 이들의 편승도 규탄 타도할 것이다.주)005

5월 26일에도 서울의 대학가는 ‘난국 타개’를 외치는 학생들의 외침이 멈추지 않은 채, “1주일간의 냉각 기간 안에 정부가 반성하지 않으면 극한투쟁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교내에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가졌다.

특히 성남고 학생 1200명은 고교생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학생의 움직임에 호응, ‘법원 난입 무장군인들에 대한 모의재판’을 열고 사법부 침입 무장군인의 엄중 처단을 요구한 뒤 거리로 나갔다가 6명이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모의재판에서 검찰관은 교수형을 구형했고, 변호사는 “애국적 충정에서 우러난 행동이므로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죄 변론을 폈으나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했다. 피고인석의 허수아비는 학생들에 의해 찢겨졌다.

한양대 학생 800여 명은 노천강당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여야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여, “집권 의식에 분망하여 악랄한 수단과 방법도 불사하는 소아병적 관습으로 국민을 누르고 국민을 우롱하려는 비인도적, 비국민적인 정치인들은 각성하라”고 경고했다. 동덕여대 학생 100~200여 명은 궐기대회를 열고 25일 서울대 등 각 대학에서 채택한 것과 같은 내용의 구국선언비상결의문 및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덕성여대 학생 200여 명도 강당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단국대 학생 500~800여 명은 대강당에 모여 궐기대회를 열고 결의문,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행동강령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뒤 해산했다.주)006

결과/영향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는 30여 대학 학생회가 연합해 준비했음에도 실제로는 절반에 못 미치는 일부 학교에서만 학내 집회로 이루어졌다. 또한 박정희 정권과 밀착한 몇몇 학생회로 인해 모의 과정에서부터 외부 개입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갈등이 많았다. 그럼에도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는 학생회라는 전체 학생 공조직을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는 면에서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대회 행동강령에서 “금주 내 우리의 의로운 주창(主唱)이 관철될 획기적 전기가 없을 때는 4.19정신으로 실력 투쟁도 불사할 것을 천명한다”고 명시하고 실제로 1주일간 행동을 유보하기로 함으로써 이후 6.3항쟁의 길을 예고했다.

5월 28일 서울 시내 28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서울대 법대 구내 다방에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준비위 제3차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앞서 구국비상선언에서 내건 요구가 30일 밤 12시까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실력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전국 100만 학도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대정부통고문’을 채택했다.

29일 34개 대학 학생회장은 ‘난국타개대책회의’를 갖고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의 결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30일에는 학생 대표 5명을 정일권(丁一權) 총리에게 보내 30일 밤 12시까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시 실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위에 법대로 대응할 것임을 천명하여 학생과 정권의 갈등은 고조됐다.

주)001
<“친진보 반보수 내가 기초했다”>, ≪동아일보≫, 1964. 5. 28. 
주)002
<대학가 또 뒤숭숭>, ≪동아일보≫, 1964. 5. 25. 
주)003
<대학가 또 뒤숭숭>, ≪동아일보≫, 1964. 5. 25. 
주)004
<대학가 또 뒤숭숭>, ≪동아일보≫, 1964. 5. 25. 
주)005
<학생들 ‘난국타개 궐기대회’>, ≪동아일보≫, 1964. 5. 25. 
주)006
<학생 ‘궐기대회’ 이틀째>, ≪동아일보≫, 1964. 5. 26. 
멀티미디어
  • 서울대생들이 5.25난국타개총궐기대회 후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경향신문, 1964.5.25.)
  • 1964년 5월 25일 고려대 난국타개궐기대회 집회(고대신문)
참고문헌
  • ≪대학신문≫, ≪고대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예문, 1996.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0: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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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난국타개에 대학생들 궐기대회>, 《조선일보》, 1964. 5. 26.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대학가 또 뒤숭숭>, 《동아일보》, 1964. 5. 25.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학생들 '난국타개궐기대회'>, 《동아일보》, 1964. 5. 25.
[경향신문]서울대생들이 5.25난국타개총궐기대회 후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
[고대신문]1964년 5월 25일 고려대 난국타개궐기대회 집회(고대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중압감 속의 초긴장>, 《경향신문》, 196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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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 설명 서울대생들이 5.25난국타개총궐기대회 후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경향신문, 1964.5.25.)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