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과 학원 사찰에 대한 반대 시위
박정희 정권의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원 사찰 문제로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4월 17일 서울대 학생 200여 명이 한일 굴욕외교 반대, 학원 사찰 즉각 중지, 폭력과 탄압을 일삼아온 중앙정보부 해체와 구속된 김중태 군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민족 반역 도배를 즉각 처형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억압하지 말라”, “YTP를 비롯한 사이비 학생조직을 자진해서 해체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 그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확답을 듣기 위해 청와대를 향해 나섰으나 경제기획원 앞에서 300여 명의 서울시경 기동경찰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청와대 쪽으로 거리행진이 저지되자 시위대는 국회 앞에 집결해 연좌데모를 전개했다. 4월 18일 경향신문 사설은 ‘학원 사찰은 민주주의의 교살이다’라는 제목 아래, 4월 17일 시위에 대해 “감시와 공작과 유혹의 대상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 우리는 이 나라의 억제할 수 없는 생명력과 줄기찬 민주주의의 샘물을 감명 깊게 느낀다”면서 옹호했다.
4.19 4주년이었던 19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정부 주최 기념식에서 박정희는 기념사를 통해 “4.19의거는 일찌기 우리 국민이 폭력과 사악에 대한 정의의 공분을,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전 세계에 과시한 뜻깊은 날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시각 시청 앞에서 기념식을 가진 17개 대학 1000여 명의 학생들도 “조국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체의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요지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주)002
각 대학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렇게 큰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4.19 제5선언문을 통해 “한일회담은 정치, 경제, 문화의 제 영역에 있어서 일본의 모든 침투를 소화할 수 있는 민족적 자립의 토대를 완전 구축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재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03 그리고 기념식 후 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20일과 21일에도 동국대, 서울대 문리대, 성균관대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시위 구호는 “학원사찰 중지”와 “한일회담 반대”로 모아졌다. 정부는 학생시위에 대해 19일부터 강경 탄압책으로 맞섰다. 19일 이후 3일 동안 경찰은 하루 평균 80발의 최루탄을 난사했고, 21일 시위는 종로 3, 4, 5가 일대에서 흡사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일대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학생들에게 돌격해 치고 차며 잡아가자 보고 있던 시민들까지도 경찰에 투석을 해 민간인도 다수 체포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3일 동안 학생 83명, 민간인 20명, 경찰 10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학생 88명에 대한 대량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내각에 내린 훈령에서 무제한 방종의 개념으로 흐른 학생 기풍은 국가 장래를 염려케 하는 것으로 불법 데모 등 범법 학생들은 퇴학 처분 등 응분의 조치를 취하고 학교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정부는 강경 진압책을 마련했는데 특히 문교부는 서울 시내 대학 총・학장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시위를 계속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학칙에 따라 강경한 조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