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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사찰규탄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YTP 색출엄단"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 경찰과 맞서는 학생시위대(송철원 제공)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영어표기
The Protests against undercover police surveilance on campus
한자표기
學園査察糾彈運動
발생일
1964년 4월 17일
종료일
1964년 4월 24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서울

개요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지속적으로 대학생들과 학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가던 상황에서 3.24시위 이후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친북 좌익 세력으로 모는 정치공작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이를 규탄하며 4월 17일에서 23일까지 벌인 일련의 시위를 말한다. 4월 24일 서울 시내 대학 총·학장들이 모여 학생들의 학원 복귀와 정부의 학원 자유 보장을 요구한 후 시위는 중단됐다.

배경

3.24학생시위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서막이었다. 3.24시위를 경험한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한일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박정희 정권은 YTP(Young Thought Party, 청사회) 등을 통한 정치공작과 학원 사찰을 보다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4월 1일 야당인 민정당은 3.24학생시위 이후 강화된 학원정치사찰을 즉각 중지하라면서, “각 대학의 학생과에는 모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64년 사립학교법 개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24시위 이후 박정희 정권은 시위 방지책으로 사립학교법을 이용하고자 했다. 즉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시위를 사전에 막지 못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정부가 학교법인 임원과 학교장의 취임 또는 임명 승인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학교 당국에 엄청난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상임위원회에서 의결된 직후인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데모가 있을 경우 총·학장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도록” 국무총리에게 지시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윤보선(尹潽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은 4월 24일 “박정희 정권은 실정과 민생고의 한계선을 넘어 국기(國基)의 대본(大本)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학생들에 대한 퇴학 위협, 총장 등에 대한 파면 위협, 무차별 구속과 학원 사찰 및 언론 규탄 등을 즉각 중지하여 스스로 범한 죄과를 국민 앞에 고백하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하면서, “국민들은 구국하기 위해 마음의 결심을 할 때가 왔다. 구국 대열에 참여하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원인

괴소포 받은 고대생 서진영(왼쪽)와 박정훈(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3.24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친북 좌익 세력으로 모는 정치공작을 시도했다. 학생시위가 잠잠해진 4월 8일 서울대 학생시위를 주도한 김중태(金重泰)와 현승일(玄勝一)에게 각각 괴소포가 배달됐다. 4월 9일에는 고려대 박정훈(朴正勳)과 서진영(徐鎭英), 연세대 안성혁(安聖爀)에게 각각 괴소포가 배달됐다. 괴소포의 발신 주소는 모두 부산이었고 발신자는 재일교포로 추정됐다. 소포 속에는 “당신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한다. 계속 박 정권 타도에 힘써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미화 100달러가 들어 있었다. “국내에 잠입한 5열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는 검찰의 발표와는 달리, 시위 주도 학생들을 북한과 연계시키려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괴소포를 받은 학생들은 “간첩의 짓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며 이를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규정하고 사건을 언론에 폭로하면서 “매카시즘의 희롱”이라 비난했다. 비슷한 내용의 소포가 야당인 삼민회의 조재천(曺在千) 의원에게도 배달되자 야당은 즉각 학원 및 정치인 사찰 문제를 따지기 위해 관련 장관들의 국회 출석을 요구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학원사찰을 금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동안의 학원사찰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야당은 평소에도 정보원들이 학생을 가장해서 도강(盜講)을 하며 학생들의 연구 단체에 침투한다고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4월 13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서 야당은 “지난번 불온 소포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연극”이라고 지적하면서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자유당 정권 방식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민정당 김영삼(金泳三) 의원은 “대학생이 사찰을 받을 만큼 사상이 불순한가”라고 반문하고 “YTP라는 괴 조직체가 각 대학에 있다고 아는데 이 조직체의 예산은 내무부의 어느 항목에서 나오는가”라고 질의했다. 양찬우(楊燦宇) 내무차관은 “YTP라는 조직체는 금시초문”이라면서 “북괴의 공작 기술이 아주 발달되어서 괴소포사건을 국내에서 조작한 것처럼 꾸몄다”고 답변했다.주)001

YTP는 Young Thought Party(청사회)의 약자로 4.19 직후 KKP(구국당)라는 비밀결사에서 출발했다가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과 밀착한 극우 청년・학생단체였다. 이미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은 각 대학에 공화당과 연계한 YTP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박정희의 당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 4월 학원사찰 문제가 불거지자 YTP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부는 괴소포사건을 조총련계 간첩의 소행으로 단정한다고 발표하면서도, 4월 15일 박정희는 국정 쇄신을 위한 대통령 특별성명(‘진해구상’)을 통해 중앙정보부를 완전 개편, 축소해 지방 지부를 두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본부 기구만을 국가안전보장회의 밑에 두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학원 사찰의 말을 듣고 즉시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면서 “대통령 지시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들을 사찰해야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7일에는 엄민영(嚴敏永) 내무부 장관이 직접 “학원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고 사찰 비슷한 것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개

한일회담과 학원 사찰에 대한 반대 시위

학원사찰 문제가 불거진 1964년 4월 17일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경향신문)

박정희 정권의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원 사찰 문제로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4월 17일 서울대 학생 200여 명이 한일 굴욕외교 반대, 학원 사찰 즉각 중지, 폭력과 탄압을 일삼아온 중앙정보부 해체와 구속된 김중태 군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민족 반역 도배를 즉각 처형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억압하지 말라”, “YTP를 비롯한 사이비 학생조직을 자진해서 해체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 그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확답을 듣기 위해 청와대를 향해 나섰으나 경제기획원 앞에서 300여 명의 서울시경 기동경찰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청와대 쪽으로 거리행진이 저지되자 시위대는 국회 앞에 집결해 연좌데모를 전개했다. 4월 18일 경향신문 사설은 ‘학원 사찰은 민주주의의 교살이다’라는 제목 아래, 4월 17일 시위에 대해 “감시와 공작과 유혹의 대상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 우리는 이 나라의 억제할 수 없는 생명력과 줄기찬 민주주의의 샘물을 감명 깊게 느낀다”면서 옹호했다.

4.19 4주년이었던 19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정부 주최 기념식에서 박정희는 기념사를 통해 “4.19의거는 일찌기 우리 국민이 폭력과 사악에 대한 정의의 공분을,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전 세계에 과시한 뜻깊은 날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시각 시청 앞에서 기념식을 가진 17개 대학 1000여 명의 학생들도 “조국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체의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요지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주)002

각 대학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렇게 큰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4.19 제5선언문을 통해 “한일회담은 정치, 경제, 문화의 제 영역에 있어서 일본의 모든 침투를 소화할 수 있는 민족적 자립의 토대를 완전 구축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재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03 그리고 기념식 후 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20일과 21일에도 동국대, 서울대 문리대, 성균관대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시위 구호는 “학원사찰 중지”와 “한일회담 반대”로 모아졌다. 정부는 학생시위에 대해 19일부터 강경 탄압책으로 맞섰다. 19일 이후 3일 동안 경찰은 하루 평균 80발의 최루탄을 난사했고, 21일 시위는 종로 3, 4, 5가 일대에서 흡사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일대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학생들에게 돌격해 치고 차며 잡아가자 보고 있던 시민들까지도 경찰에 투석을 해 민간인도 다수 체포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3일 동안 학생 83명, 민간인 20명, 경찰 10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학생 88명에 대한 대량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내각에 내린 훈령에서 무제한 방종의 개념으로 흐른 학생 기풍은 국가 장래를 염려케 하는 것으로 불법 데모 등 범법 학생들은 퇴학 처분 등 응분의 조치를 취하고 학교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정부는 강경 진압책을 마련했는데 특히 문교부는 서울 시내 대학 총・학장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시위를 계속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학칙에 따라 강경한 조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학원사찰조사위원회의 ‘학원사찰 및 학원 분열에 대한 보고서’ 공개

박정희 정권의 강경 진압책에 맞서 4월 23일 서울대 문리대 학원사찰조사위원회는 학원 사찰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학원사찰 및 학원 분열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기자로 신분을 가장한 서울대 출신 선배를 통해 학생 1인당 2000∼3000원을 정보비로 제공하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또한 이 보고서는 그동안 의혹이 제기되었던 YTP(청사회)의 실체를 폭로했다. 성토대회는 ①(서울대 문리대 내) 37개 사이비 학생단체는 즉시 자진 해체하라 ②공화당은 자금 제공을 즉시 중지하고 공개 사과하라 ③학교 당국은 학원 사찰 방지에 솔선수범하라 ④정부는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등의 결의를 한 뒤 해산했다.

서울대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4월 23일 YTP 실체를 폭로한 것을 보도한 <<새세대>> 기사.(송철원 제공)

학원사찰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63년 7월 발기인 대회 후 남대문 근처 금마차 다방 위층에 총본부를 두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YTP는 회원들에게 “①회의・교육・훈련 활동, 명령 등 일체의 비밀은 생명으로 엄수하며 배신을 할 때는 생명을 바친다. ②명령은 생명을 걸고 절대 복종한다. ③반공을 조직의 제일주의로 삼고 혁명과업 수행에 전력을 경주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서약서를 쓰게 했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우 30여 명의 YTP 회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 조직인 ‘서울위원회’로부터 월 1만 원 정도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폭로 당시 서울대 YTP는 문리대를 넘어 법대와 미대로 팽창하던 도중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 여론이 악화하자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지만, 이후 YTP는 학원사찰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YTP 외에도 서울대 문리대 내에만 사이비 학생 단체가 37개가 존재했고 그중 일부에는 공화당 자금이 유입됐다.주)004

정권의 학원사찰은 서울대 외에도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고려대의 경우 YTP와 같은 특별한 단체를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운동부 학생들을 포섭하여 정보를 얻고 시위 주도 학생들을 위협했다. 정권은 금전, 향연, 유학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학생 혹은 직원들을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학원을 사찰했다. 여기서 학생회 간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국대의 경우 4월 24일 500~1000여 명이 모여 학원 사찰 성토대회를 열고, ①5.16은 4.19의 연장이 아니다 ②대일 굴욕회담 반대 ③구속 학생 즉시 석방 등의 격문을 낭독한 뒤, ①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원 사찰의 철폐를 위해 투쟁한다 ②YTP를 색출, 폭로한다 ③정부는 부정부패를 공개하라 ④구속 학생 즉시 석방하라 ⑤평화적 시위 막지 말라, 전제적 방법을 자행할 때는 극한투쟁을 벌이겠다는 등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회를 마쳤다.주)005 이 과정에서 집회 참여 학생들과 일부 총학생회 간부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학생회 간부 매수는 한일회담반대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 사이의 불신을 조장하여 응집력을 떨어뜨리고 운동 과정에 정권이 은밀하게 개입할 여지를 만들었다.

결과/영향

1964년 6월 17일 서울 성북경찰서가 작성한 고려대 시위 조직도.

4월 24일 서울 시내 28개 대학 총・학장들이 모여 학생들의 학원 복귀와 정부의 학원 자유 보장을 요구한 후 학생시위는 일단 중지되었다. 학교 당국자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5.16쿠데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이 시국 수습 방안으로 채택한 결의문의 골자는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정부는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데 과감해 다시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여야는 정쟁 지양에 노력하고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원사찰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주)006 4월 26일 교도소에서 출감한 시위 학생 14명은 “학생은 학생의 자유, 신문은 신문의 자유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학원의 정치사찰은 언어도단이므로 YTP 같은 것을 박멸하기 위해 계속 투쟁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정보기관을 동원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과 학원사찰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 통치 수법이었다. 여기에 같은 시기 논란이 된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관련 부정부패 의혹도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의심과 반감을 키웠다. 1964년 3월 26일 김준연(金俊淵)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 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4월 2일에도 박정희-김종필(金鍾泌)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2000만 달러를 받아 썼다는 등 13가지 의혹 사항을 제시했다.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했고, 여야의 격돌 끝에 결국 4월 25일 김 의원은 구속되었다. 의혹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성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다. 결국 괴소포배달사건, 학원사찰 폭로, 부정부패 의혹 등을 거치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성격은 확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주)001
<야, 학원의 정치사찰을 힐난>, ≪경향신문≫, 1964. 4. 13. 
주)002
<시국선언문 등 채택>, ≪동아일보≫, 1964. 4. 20. 
주)003
<(자료) 시국선언문-민주 자유의 메아리>, ≪사상계≫, 1969년 5월호, 48~49쪽. 
주)004
, ≪동아일보≫, 1964. 4. 24;<학원사찰, 그 정체 사월 교정에>, ≪대학신문≫, 1964. 4. 27. 
주)005
<“학원사찰을 철폐 부정부패 공개도”>, ≪동아일보≫, 1964. 4. 24. 
주)006
<“부패정치 없애라”>, ≪경향신문≫, 1964. 4. 25. 
멀티미디어
  • 학원사찰 문제가 불거진 1964년 4월 17일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경향신문)
  • 서울대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4월 23일 YTP 실체를 폭로한 것을 보도한 <<새세대>> 기사.(송철원 제공)
  • 1964년 6월 17일 서울 성북경찰서가 작성한 고려대 시위 조직도.
  • 서울대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4월 23일 YTP 실체를 폭로한 것을 보도한 <<대학신문>> 기사.(송철원 제공)
  • 괴소포 받은 고대생 서진영(왼쪽)와 박정훈(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괴소포사건에 대한 기사
참고문헌
  • ≪동아일보≫, ≪경향신문≫, ≪대학신문≫, ≪신사조≫
  •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학원·간첩편(Ⅵ)≫, 국가정보원, 2007.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0: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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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송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