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양과 박정희의 민정 참여 문제
8.15계획서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롯한 많은 군인들은 민정이양을 추진하면서도 다시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정에 참여하여 권력을 계속 장악하고자 했다. 때문에 군사정부 인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정희 역시 1962년 12월 27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일정을 발표하면서 자신과 다른 군인들의 민정 참여 결정을 밝혔다. 박정희는 민정 참여를 분명히 했을 뿐만 아니라 완곡하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까지 피력했다.
이에 먼저 야권이 반발하고 나섰다.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허용되면서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었던 정치인 중 다수가 이 조치에서 풀렸다. 이들은 곧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에 대비해 제각각 정당을 조직했다. 구 민주당 구파가 중심이 되어 만든 ‘민정당’은 1963년 1월 24일 발기인대회에서 군정의 주체세력이 민정에 참여함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발기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구 민주당 신파가 중심이 된 ‘민주당’ 역시 2월 1일 창당 준비 대회에서 어떠한 형태의 군사통치의 연장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정 참여를 둘러싼 심각한 논란과 반발은 군사정부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중정과 재건동지회를 통해 은밀히 관제여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을 만들고 있었던 김종필은 1962년 12월 23일 최고위원들에게 공화당 창당 상황을 보고했다. 1963년 1월 10일 김종필을 비롯한 발기인 12명이 제1차 모임을 열고 공화당 창당 작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1월 18일 발기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공화당 사전조직에서 소외된 김동하(金東河)와 김재춘(金在春) 등 군정 내 김종필 반대세력은 공화당의 이원(二元)조직과 공산당식 밀봉교육을 문제 삼아 공화당 창당에 반대했다. 김종필의 독주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최고회의는 1963년 1월 21일과 23일에 잇달아 회의를 열고, 김종필의 당직 사퇴와 중정의 당 관여 금지, 당 발기위원회의 전면 개편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군부와 미국도 반대했다. 1963년 2월 16일 국방부에서는 각 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각 군 수뇌부들은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결의했다. 군의 정치 참여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권의 창출과 정치무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했다. 결국 박정희는 1963년 2월 18일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간정부 지지 등 9개 항의 시국수습안 제안이 수락된다면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2.18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2.18성명에 대해 국민들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2월 20일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 김종필은 2월 25일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났다.
박정희의 민정 이양 약속 파기
1963년 2월 27일 각 정당 및 정치지도자 27명과 국방부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등이 모여 박정희의 2.18성명을 수락한다는 ‘정국수습선서와 선서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혁명 정부의 노력은 대다수 정치인들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쳐 일대 정치적 난국을 초래하게 됐으며 급기야 오늘 이와 같이 정부 계획의 대폭적인 후퇴와 양보로써 이 정국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면서, 민정 불참 약속을 마지못해 재확인했다(2.27선서). 박병권(朴炳權) 국방부 장관은 이를 굳히기 위해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7일 박정희는 원주 제1군사령부를 방문해, 해악을 끼친 구 정치인은 물러나야 하며 만약 정계가 혼란해진다면 다시 민정에 참여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3월 11일에는 김동하, 박임항(朴林恒), 박창암(朴蒼岩), 이규광(李圭光) 등이 연루된 ‘군일부반혁명음모사건’(소위 ‘알래스카토벌작전’)을 통해 군사정부 내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며칠 후인 3월 15일 박정희의 측근인 박종규(朴鐘圭)의 사주를 받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60여 명의 현역장교와 30여 명의 하사관들이 최고회의 청사 앞 광장에서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라”, “박정희 의장은 민정에 참여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고회의 소속 헌병이나 경호원들은 아무도 이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3월 16일 박정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민정 불참 약속은 물론 민정이양 약속까지 파기하고, 군정을 다시 4년간 연장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중대 성명(3.16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해 모든 정당 활동을 일시 중지시키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했다. 또한 군정 연장 제의가 국민투표에서 가결될 경우 과도적 군정 기간에 실시할 5가지 시책도 밝혔다. 엿새 후인 3월 22일 오전 160명의 군 지휘관이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김성은(金聖恩) 국방부 장관을 선두로 97대의 지프차에 분승해 청와대로 달려가는 사태(‘지프차데모’ 또는 ‘별판데모’)가 벌어지기도 했다.
군정연장반대운동의 전개
국민과 한 약속을 파기한 박정희의 번의(翻意)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충격과 분노 속에 각계각층에서 들고일어났다. 3.16성명 다음날인 3월 17일 종로 화신백화점 옥상에서 4월혁명총연맹 소속 두 명의 청년이 ‘군정연장을 위한 국민투표는 부당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3월 19일 윤보선(尹潽善), 이범석(李範奭), 장택상(張澤相),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등 5명의 재야 정치인들은 박정희를 방문해 3.16성명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3월 20일 재야 정치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16성명을 무조건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과도정부 수반 허정(許政)은 3월 20일 우리나라 1인 시위의 효시 격인 소위 ‘산책데모’를 전개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청 부근에서 을지로 입구 쪽으로, 허정은 무교동에서 시청 쪽으로 걸어갔는데, 약 20분 간격으로 윤보선이 먼저 출발했다.
3월 22일 윤보선, 변영태(卞榮泰), 백두진(白斗鎭), 박순천(朴順天) 등 재야 정치인 150여 명은 종로에서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고 군정연장반대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나오자 경찰기동대는 시위대를 물건상자 나르듯 연행했다. 이날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①우리는 군정 연장을 절대 반대한다. ②우리는 짓밟힌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하여 3.16성명을 철회할 때까지 계속 투쟁한다. ③우리는 불순분자의 준동을 경계하며 평화적이며 질서정연한 행동을 취한다.
3월 23일 229명의 재야법조인으로 구성된 서울제일변호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민정이양은 절대적인 것이고, 군정 연장 여부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2.27선서에 의한 선거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며, 군의 정치 관여는 2.27선서에 위반될 뿐 아니라 국가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군은 엄정 중립되어야 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같은 날 4.19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9개 학생단체의 집합체인 ‘전국4월혁명단체동지회’도 ‘3.16성명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군정연장반대운동은 각 지방에도 번져 서명운동, 강연회 개최, 시위 등으로 적극화됐다. 3월 22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군정연장반대시위 등을 하다가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검거돼 군사재판에 구속 송치된 사람들은 서울 87명, 광주 14명, 부산 9명, 대전 3명 등 모두 110명에 달했다. 다음날인 3월 23일 대구에서는 전 민의원 4명을 포함해 40여 명이 “군정을 절대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무언의 시위를 감행, 2000여 명의 시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경찰에 연행됐다. 3월 25일 민정당은 변호인단을 구성(김명윤(金命潤) 외 10명)을 구성, 3.22군정반대시위를 비롯한 전국적인 시위 관계 구속자 및 불구속 입건자 전원에 대한 변호 활동을 펴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3월 29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및 법대 학생 400여 명이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군정연장 결사반대”와 “구정치인은 자숙하라”, “우리는 자주국민”이라는 세 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자유수호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학생들은 선언문을 통해 한국 정치사에서 불합리한 방법으로 집권 연장의 가능성을 수립하려는 군정의 비논리를 규탄했고, 결의문을 통해 군사정부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비합리・비민주적 3.16성명을 즉시 철회하고 2.27의 역사적 가치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국민과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군사정부는 자신이 약속한 혁명공약과 민정이양 계획을 번의에 번의를 거듭, 드디어는 군사통치의 4년 연장 기도를 노골화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건전하고 완전한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유의 종을 강타하련다”고 밝혔다. 이날 궐기대회를 마친 뒤 학생들은 2시간 가까이 토론을 하고 산회했다. 같은 날 각종 4월혁명단체들을 통합한 ‘4월혁명단’(가칭) 발기인총회를 열고 “여하한 형태의 군정 연장도 결사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3.16성명에 대해 언론도 강하게 반발했다. 3.16성명이 발표됐을 때 창간 10주년 기념호였던 ≪사상계≫ 4월호는 이미 편집과 조판이 끝나서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발행인 장준하(張俊河)는 긴급 편집회의를 소집하고 편집을 완전히 바꾸어 ‘군정 연장 반대’ 특집을 꾸몄다. 지면의 3분의 2 이상이 ‘번의! 번의! 번의’라는 특별 화보와 군정 연장을 반대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특집에 참여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하는 재야인사들로, 김병로, 변영태, 윤보선, 이범석, 이희승(李熙昇), 최석채(崔錫采), 홍종인(洪鍾仁), 홍승면(洪承勉), 김성식(金成植), 신상초(申相楚), 탁희준(卓熙俊), 조지훈(趙芝薰), 부완혁(夫琓爀) 등이었다. 4월호 초판 5만 부는 1주일 만에 매진됐고, 2판 1만 부를 더 찍었으나 곧 매진되어 3판 5000부를 다시 인쇄해서 배본했다.
박정희의 3.16성명이 나오자 ≪동아일보≫는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12일 동안 사설 없는 신문을 발행했다. ≪조선일보≫, ≪대구매일신문≫, ≪경향신문≫도 한동안 사설 게재를 중단했다. 사설을 싣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군정 연장 반대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의 군정 연장 성명이 발표되자 즉각 반대를 표시하면서 원조 중단 압력과 더불어 타협을 당부했다. 3.16성명 다음날부터 한국으로 향해 가고 있던 잉여농산물 수송을 즉각 취소하고 가까운 기항지에 대기하도록 시달한 것이다.
3월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최경록(崔景祿)과 강문봉(姜文奉) 등 2명의 퇴역 중장을 비롯한 6명의 한국인들이 30분간 한국의 군정 연장에 항의하고 미국에 대해 한국의 군부 통치를 지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3월 23일에는 10여 명의 재미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인은 민주정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군정 아닌 민주주의를 원한다”, “군사통치를 종결시켜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백악관 주변에서 시위했다. 3월 25일 미 국무성은 공식 논평을 통해 박정희의 군정 연장 계획에 대한 반대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